전두환 정권 때 고문을 받고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한 피해자 등이 22일 서울중앙지법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이른바 녹화사업을 통해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은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6부(황순현 부장판사)는 22일 이종명·박만규 목사가 국가를 상대로 낸 3억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90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에서 지난해 대학생을 불법 징집하고 그들에게 위협이나 폭력, 가혹 행위에 대해 인간 존엄과 가치를 본질적으로 침해하고 신체의 자유와 사상·양심의 자유 등 인권을 총체적으로 유린한 사건이란 진실 규명 결정을 한 바 있다"며 "원고들이 불법 구금과 폭행, 협박을 받고 동료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는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은 사실과 이후에도 감시 사찰을 받은 사실은 인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가가 피해를 회복하겠다는 진실규명을 결정했음에도 다시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주장을 내세워서 책임을 면하려 하는 것은 용납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녹화사업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인 1970~80년대 육군 보안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가 학생운동에 가담한 학생들을 강제 징집하고, 일부 학생을 운동권 시위계획 등에 관련된 첩보를 수집하는 이른바 '프락치'로 활용한 정부 차원의 공작이다. 녹화사업은 '빨간 물을 빼고 푸른 사상을 주입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1971년부터 1987년까지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시위 전력이 있는 학생이나 사찰 대상자들을 체포·구금한 뒤 제적·휴학 처리하고 강제 입영 조치해 사회와 격리했다. 이후 프락치 활동에 투입된 학생들은 전두환 찬양서적을 읽고 반성문과 서약서를 작성하도록 강요받았다. 아울러 소속 대학에서 교내 서클이나 연계조직의 동향을 파악하는 작업에 투입됐다.
2기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11월 두 목사를 포함해 모두 187명을 녹화사업 피해자로 인정하고 국가의 사과와 보상을 권고했다. 이에 두 사람은 지난 5월 국가를 상대로 3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박 목사는 1983년 9월 육군 보안사 분소가 있는 경기 과천 아파트에서 약 10일간 구타·고문을 당한 후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했다. 학군장교(ROTC) 후보생이었던 이 목사 역시 보안사에 연행돼 일주일이 넘게 조사를 받으며 진술과 함께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전두환 정권 시절 고문을 받고 프락치(신분을 속이고 활동하는 정보원) 활동을 강요당한 피해자 박만규 목사가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선고공판을 마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박 목사는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에게 "인권의 최후 보루인 법원이 국가의 불법 행위를 인정해줘서 참으로 다행스럽다"며 "다시는 우리나라에 저같은 피해를 입는 분들이 없도록 법원의 엄중한 판결이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지난달 31일에도 101명을 추가로 녹화사업 피해자로 인정하고, 국가의 사과와 명예 회복 조처 등을 권고했다. 이날 법원 판결로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이 배척된 만큼 관련 소송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