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제약회사에서 품질관리원으로 일하는 박 모 씨(26)는 지난 2주간 매일같이 야근을 했다.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면 자정을 훌쩍 넘겼다. 3년마다 오는 식약처의 감사를 앞두고 서류를 훑고 보충하느라 직원 전체가 말 그대로 '비상'에 걸렸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업무량이 많아 한두 시간 야근은 밥 먹듯이 했지만 근 2주간은 주말도 반납하고 회사에 나가야 해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었다. 이렇게 일을 하니 몸도 마음도 다 지쳐갔다. 자료를 살피던 옆자리 동료도 한숨을 푹푹 내쉬며 눈이 침침하다, 머리가 아프다는 등 과로를 호소했다.
박 씨도 마찬가지다. 피로가 쌓여 예민해졌고, 동료들과 부딪히는 일도 잦았다. 이대로 계속 일을 하다가는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특히 포괄임금제로 계약을 해 초과수당도 받지 못했기에 동료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이처럼 현장에서는 지금도 주 52시간제도조차 지켜지지 않아 노동자들이 과로로 지쳐가고 있는데, 앞으로는 회사의 '사정'에 따라 이틀 연속 밤샘 근무까지 해야할 수도 있게 됐다.
대법원이 지난 25일 초과 연장근로시간의 초과 기준을 '주 단위'로 계산해야 한다며 기존 하급심과 노동부의 행정해석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주일 총 근로시간 52시간을 넘지만 않으면 이틀 연속 최장 21.5시간(휴게시간 2.5시간 제외) 근무도 회사가 적법하게 시킬 수 있게 된다. 하루 15시간씩 3일을 몰아 일을 하게 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CBS노컷뉴스가 26일 박 씨를 비롯한 각계 현장 노동자들의 반응을 들어보니 "주 52시간조차 안 지켜지는 상황"이라며 근로 환경이 더욱 나빠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이번 대법원 판결로 회사가 연속 밤샘 근무를 시킬 근거를 만들어준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모빌리티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김 모 씨(25)는 "애초에 지금도 주 52시간을 훌쩍 넘겨 일을 하고 있다"며 "이번 판결로 자유롭게 회사에서 야근을 시킬 수 있는 합법적인 장치마저 생긴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전시업계 종사자 최 모 씨(27)는 "업계 특성상 전시 전 1~2주가 가장 바쁘다"며 "주 52시간을 넘기면 추가 수당을 주고 대체 휴무를 줘야 하는데, 휴식 시간도 보장되어 있지 않아 눈치껏 쉬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 모 씨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하겠지만, 아무도 신고한 사람이 없다. 회사가 지시하면 노동자는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지금 회사에서 연장근무 수당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번 대법원 판결로 좌절감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노동계는 이번 판결로 노동자의 건강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직장갑질119 박성우 노무사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업무량의 기복이 있어 몰아서 일하는 근무형태를 가진 노동자의 건강권이 침해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노무사는 "대법원의 주 단위 셈법이 법리적으로 잘못됐다고 보긴 어렵지만, 하루 연장근로 상한 설정이 없는 현행법에서는 아쉬운 판결"이라며 "하루 연장근로 상한선을 정하고 있지 않은 입법 미비를 해결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유럽연합(EU)은 근로시간 지침에서 하루 11시간 연속휴식 원칙을 제도화했다. 노동자가 최소 11시간을 쉴 수 있도록 해 하루 연장근로 상한을 13시간까지 제한하자는 의도에서다. 대법원 판결에 맞춰 우리나라도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