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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에 부동산 폭등 있었다…50년 동안 15배 폭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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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한양에 부동산 폭등 있었다…50년 동안 15배 폭등

    조선시대 부동산 거래 문서는 기존 문서에 새 문서를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보존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조선시대 부동산 거래 문서는 기존 문서에 새 문서를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보존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조선시대에도 토지와 가옥은 주요한 부의 축적 수단이었다. 특히 한양에 있는 주택과 토지는 언제나 수요가 공급보다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무엇보다 중앙관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양에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경상도에 상당한 재산을 보유했던 퇴계 이황의 경우도 자신의 문집에 '한양의 셋집'이라는 표현을 남겼다. 벼슬살이하던 중에는 한양의 주택에 세를 내고 살았다는 얘기다.
     
    그보다 더 후대에 이르러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예 '한양에 살며 안목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하고 적어도 한양에서 10리 밖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한양의 부동산이 중요한 가치를 띠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거래 발생할때마다 이어붙인 점련문서

     
    서울역사박물관은 최근 한성부 부동산의 300년 매매문서를 정리해 '조선후기 한성부 토지·가옥 매매문서1'이라는 자료집을 발간했다고 4일 밝혔다.
     
    조선시대 토지와 가옥을 거래한 문서는 매수와 매도가 이뤄질 때, 계약서(명문 明文) 비롯한 거래서류를 기존의 서류에 이어붙이는 형식(점련문서)으로 작성했다.
     
    문서에는 매수, 매도자와 매매가 뿐만 아니라 거래를 증명하는 증인, 공공기관의 공증문서, 매도하는 이유 등이 적힌 문서도 딸려있어, 해당 부동산에 대한 거래 역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매매기록을 이어붙여 해당 부동산 거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매매기록을 이어붙여 해당 부동산 거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실제로 동대문 밖 농지를 거래한 문서는 모두 36점의 문서가 연결돼 길이만 12미터에 이르는데, 1609년부터 1765년까지 150년 동안 토지를 거래한 이력과 소유자를 확인할 수 있다.
     
    자료집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도 한양에서는 주택이 짧게는 1년 만에 손바뀜이 이뤄지기도 하는 등 매우 활발한 주택 거래가 이뤄졌다. 곧바로 매수자가 나타날 만큼 한성부 내에 있는 주택 수요가 상당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구한말에 주택가격 폭등

     
    한양의 주택 가격은 1600년대에서 1700년대까지는 그래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만한 상승을 보였는데 18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한 상승이 나타났다.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나타난 것이다.
     
    자료집에 따르면, 지금의 종로구 공평동 일원에 해당하는 건평방 전의감동계 회화동 주택은 와가(기와집) 21칸, 공대(마당) 51칸으로 이뤄진 대형주택으로 1714년부터 1893년까지 180년 동안 19번의 거래가 발생했다.
     매매문서 서명부분.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매매문서 서명부분.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724년 첫 거래에서는 해당 가옥이 은자 300냥에 거래가 됐는데 이후 큰 가격변동 없이 거래되다가 60년 뒤인 1785년에 전문(동전) 800냥(은자 400냥 수준)으로 가격이 상승한다.

    그로부터 20년 뒤쯤인 1803년에는 은자 500냥, 또 20년이 흐른 1820년에는 전문 1500냥(은자 750냥), 1844년에는 전문 1800냥으로 상승세를 보이다가 1864년에는 전문 4300냥, 1893년에는 전문 2만8000냥으로 가격이 폭등했다.
     
    180년 동안 가격이 40배 이상 뛰었고, 특히 1800년대 중반부부터 말까지 50년 사이에 가격이 15배나 폭등한 사실이 확인된다.
     
    당시 구한말은 당백전 발행 등으로 화폐 시스템이 교란되고, 외세 열강의 침탈로 국가 경제가 흔들리던 시절로, 이때 조선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나타나면서 주택 가격도 급등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노비도 자가 소유 


    한편, 부동산 거래기록에는 노비가 집을 사고 파는 사례도 등장한다. 자신의 신분을 사비(私婢)로 기록한 여성노비 '효생'은 1631년 지금의 종로구 공평동 부근의 와가 5칸, 공대 11칸의 집을 은자 150냥에 구매한다.
     
    여성노비 효생이 서명한 계약서.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여성노비 효생이 서명한 계약서.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효생은 4년 뒤 1635년 해당 주택을 매도하는데, 이때 와가 5칸, 초가 3칸, 공대 8칸으로 초가 3칸이 추가된 것으로 나타난다. 일종의 리모델링을 거쳐 매도한 것. 가격은 은자 150냥으로 매수가격과 동일했다.
     
    노비에게도 사유재산 소유와 거래가 허용됐다는 사실이 매매기록으로 확인된다. 조선시대 한성부 부동산 매매 기록에는 여성노비 뿐 아니라 여성들이 집을 소유하고 매매한 기록이 다수 발견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올해 안에 한성부 서부·남부·북부의 토지·가옥 매매문서 200여 점을 수록한 소장유물자료집 2편도 이어서 발간할 예정이다.
     
    소장유물자료집은 서울역사박물관 내 기념품점과 서울특별시청 지하에 있는 서울책방에서 구매할 수 있으며, 서울역사박물관 누리집(museum.seoul.go.kr)에서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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