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해아파트. 연합뉴스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전세보증금 수백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른바 '건축왕'에 대해 법원이 사기죄의 법정최고형인 징역 15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 피해의 심각성을 강조하며 이례적으로 사기죄의 형량을 높여야 취지의 의견을 냈다.
법원 "주거권은 천부 인권…사회공동체 무너뜨렸는데도 변명 일관"
인천지법 형사1단독 오기두 판사는 7일 선고 공판에서 사기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A(62)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고 범죄 수익 115억5천여원 추징을 명령했다. 또 같은 혐의로 기소된 공인중개사와 중개보조원 등 공범 9명에게는 각각 징역 4~13년을 선고했다.
오 판사는 "집에서 편안하게 거주할 권리는 헌법이 부여하는 기본권을 넘어선 일종의 천부 인권"이라며 "피고인들은 나이 어린 사회 초년생, 신혼부부, 70대 이상 노인과 같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전 재산이자 거의 유일한 재산을 빼앗는 등 범행 동기나 수법이 매우 불량하다"고 판단했다.
이어 오 판사는 "피고인들은 주택, 임대차 거래에 관한 사회 공동체의 신뢰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는데도 터무니없는 변명을 하면서 범행을 부인하고, 100여명의 피해자가 법정에서 진술하게 하면서 고통을 줬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오 판사는 "생존 기본 요건인 주거환경을 침탈한 중대 범죄를 저지르면서 20~30대 청년 4명이 전세사기 범행으로 극단적인 선택까지 했다"며 "그런데도 국가나 사회가 해결해야 한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재범 우려도 크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재판부 "악질 사기 범죄 예방에 부족"…사기죄 형량 상향 개정 의견
연합뉴스오 판사는 이날 판결문을 낭독하면서 이례적으로 사기죄의 법정최고형 형량을 높이는 관련법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사기죄의 법정형은 징역 10년 이하이지만 남씨와 같이 2건 이상의 사기를 저지른 피고인에게는 '경합범 가중' 규정에 따라 법정 최고형에서 최대 2분의 1까지 형을 더할 수 있다.
오 판사는 "사기죄에 대해 선고할 수 있는 한도는 징역 15년에 그치고 있다"며 "현행법은 인간 생존의 기본 조건인 주거의 안정을 파괴하고 취약계층의 삶과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사회 신뢰를 무너뜨리는 악질적인 사기 범죄를 예방하는 데 부족하다"고 밝혔다.
검찰은 앞서 지난달 17일 결심공판에서 "피해자들은 사회초년생이나 취약계층으로 전세보증금을 잃게 되면서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며 A씨에게 징역 15년을, 공범 9명에게는 징역 각각 징역 7~10년을 구형했다.
변호인 '법관 기피신청' 시도…법원 "재판 지연 의도 있다" 기각
남씨의 변호인은 선고 공판을 앞두고 "담당 법관으로부터 공정한 판단을 구하기 어렵다"며 법관 기피신청을 했다. 그러나 법원은 "적법하고 정당한 절차로 공판이 진행됐는데 재판을 지연하려는 의도가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 판사는 "A씨 등이 제출한 증거를 한 건도 기각하지 않고 채택해 줬다"며 "변호인 측은 장황하게 주택 임대차 관계 등 일반인에게 어려운 법률적 견해를 묻는 증인신문을 하기도 했으나 법관은 크게 제지하지 않았고 반대 신문에 대해서도 충분히 보장해줬다"고 기각 이유를 설명했다.
법원은 지난해 3월 A씨가 기소된 이후 변론 종결(결심 공판)까지 10개월 동안 피해자를 포함해 100명이 넘는 증인들을 신문했다.
피해자들 "피해자만 수천세대…공범 전원에 범죄단체조직죄 적용해야"
연합뉴스
전세사기 피해자들로 구성된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회는 선고 직후 "A씨 일당에게 조직적 사기를 당한 피해자는 수천세대에 이르는데 이들의 형량은 너무 낮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A씨 등 공범 전원에게 범죄단체조직죄를 반드시 적용해 법이 허락하는 최고형을 선고해야 한다"며 "이들의 사기행각 전모를 낱낱이 밝혀 범죄수익을 반드시 몰수·추징해 피해자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A씨 등은 2021년 3월부터 2022년 7월까지 인천시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등 공동주택 191채의 전세 보증금 148억원을 세입자들로부터 받아 가로챈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수사기관이 파악한 A씨 일당의 전체 혐의 액수는 453억원(563채)이지만 이날 재판에서는 먼저 기소된 148억원대 전세사기 사건만 다뤄졌다. 추가 기소된 나머지 305억원대 전세 사기 재판은 따로 진행 중이다.
A씨는 2018년 1월 동해 망상지구 사업부지를 확보하려고 건설사의 신축 아파트 공사대금 40억원을 빼돌리는 등 회사 대금 총 117억원을 횡령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도 받는다. 그는 횡령한 공사대금을 메꾸기 위해 전세 보증금을 사용하면서 보유 주택의 경매와 전세보증금 미지급 사태를 초래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인천과 경기도 일대에서 아파트와 오피스텔 등 2708채를 보유해 건축왕으로 불렸다. 지난해 2~5월에는 A씨 일당으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 4명이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