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2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한국 증시 도약을 위한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 1차 세미나'에 참석해 인사말하고 있다. 연합뉴스올해 들어 주식시장을 뜨겁게 달궈왔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시행 계획이 26일 발표됐지만 과도하게 부풀어 오른 시장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기업 가치 제고 노력을 유도하기 위한 세제 혜택 등의 구체안은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 기업 자율성이 강조되면서 이행 강제성은 사실상 결여된 점 등이 아쉬운 대목으로 거론된다. 다만 정부가 밝힌 세부 계획이 차질 없이 이행된다면 장기적으로 기업 체질 개선과 코리아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현상) 해소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긍정 평가도 있다.
韓 증시 저평가 해소 위해…기업 스스로 시장 가치 제고 방안 공시
금융위원회는 이날 국내 코스피·코스닥 전체 상장사가 기업 가치 개선 목표를 설정하고 이행 계획을 수립해 일 년에 한 번 자율적으로 공시하도록 하는 내용의 밸류업 프로그램 시행 계획을 발표했다.
[관련 기사: K디스카운트 없애자…'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보니(2월26일)] 상장사의 가치가 주식시장에서 저평가되는 코리아디스카운트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기업들이 자본 활용을 효과적으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진단 하에 자발적 가치 개선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취지다.
기업의 참여 의지에 프로그램 성패가 달린 만큼, 우수 기업과 기업 가치 제고 기대 기업 중심으로 구성된 '코리아 밸류업 지수·ETF(상장지수펀드)' 개발 등 투자 유도책과 표창 기업 대상 세무 관련 행정 지원 방안 등도 이번에 제시됐다. 3분기 개발·4분기 ETF 출시가 목표인 코리아 밸류업 지수는 주가순자산비율(PBR), 주가수익비율(PER), 자기자본이익률(ROE)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구성 종목이 결정된다.
또 연기금 등 시장의 '큰 손' 기관투자자가 상장사의 기업 가치 제고 노력을 투자 판단에 활용한다는 원칙을 스튜어드십 코드(기관 투자자 행동 지침)에 반영한다는 내용도 계획에 담겼다. 당국과 거래소는 상장사들의 관련 공시 원칙, 내용, 방법에 대한 종합 가이드라인을 오는 6월에 확정하기로 했다. 이후 하반기부터는 준비된 기업들부터 공시가 이뤄지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밸류업 성공 관건은…기업의 '자발적 참여·중장기 전략 수립'
일본 증시 정책을 본 뜬 이번 밸류업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안착해 효과를 보려면 기업들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참여와 중장기 성장 전략 수립·이행이 필수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김주현 금융위원장도 "기업 밸류업은 어떤 한두 가지 조치로 단기간에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업, 투자자, 정부가 함께 중·장기적인 시계에서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도 같은 날 금융위와 거래소 등 유관 기관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밸류업 지원 방안 1차 세미나'에서 일본의 앞선 사례 분석에 기반해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그는 주요국 최하위권인 국내 상장사들의 ROE 수준, 소극적 주주환원과 낙후된 기업지배구조 등을 코리아디스카운트 원인으로 꼽으며 "기업들의 복합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실장은 일본 중소형 제약회사인 아스카제약을 밸류업 모범 사례 가운데 하나로 꼽으면서 "장기 성장성 제고가 필요하다는 자체 진단을 기초로 조달 자본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중장기 성장성이 높은 디지털 헬스케어, 반려동물 건강 증진, 해외 사업에 투자하기로 별도 보고서를 통해 밝혔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동경 증권 거래소도 최근 기업들에 단기 PBR 개선에만 관심을 두기보다 중장기에 걸쳐 기업 상황에 맞는 다양한 수익 지표, 성장성 개선을 도모하기를 권고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도 "이번 밸류업 지원 방안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닌 중장기적 시각에서 지속해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전담 부서를 신설한 거래소는 관련 공시 정보 통합 홈페이지를 구축하고 상장사 간담회도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기업 유도할 알맹이 빠졌다" 비관론도…국내 증시도 하락 마감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기업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혜택과 책임 부여가 병행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김동양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세미나에서 "가치가 저평가 돼 있는 중견 이하 기업들의 밸류업 프로그램 참여가 중요할 것"이라며 "(이를 유도하기 위해) 자사주, 배당, 투자 등 다방면에 걸쳐서 실질적이고 강력한 세제 혜택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동섭 국민연금공단 수탁자책임실장은 "밸류업 프로그램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서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이사회가 직접적으로 관여돼야 한다"며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선 그 성과가 등기임원, 경영진의 보수와 연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번 발표안에 우수 기업에 대한 세제 지원과 관련해선 "다양한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했고, 이사회의 역할도 "책임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에 명시할 것"이라고만 밝혔다. 시장 한편에서 "정작 중요한 알맹이는 빠져 시장에 영향이 크게 없을 것"이라는 박한 평가가 나온 배경이다.
한 학계 인사는 통화에서 "밸류업 프로그램은 기업이 기득권을 좀 내려놓고, 투자자들을 위해 좀 양보하라는 취지도 있는데 그에 대한 인센티브로 제시된 건 표창을 주고, 세정지원을 하겠다는 정도"라며 "기업들로선 너무 성의가 없다고 느끼지 않겠느냐"며 이 같이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급조된 정책 아니냐"는 물음표까지 나온 가운데 당국 관계자는 "갑자기 발표한 게 아니라, 작년 하반기부터 유관기관과 협의를 해 왔다"며 "오늘 발표안은 최종안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간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상승세를 탔던 국내 증시는 이날 하락 마감했다. 코스피 지수는 전 거래일 대비 0.77% 내린 2647.09에 장을 마쳤다. 업종별로는 보험(-3.81%), 금융업(-3.33%), 증권(-2.89%) 등 정책 수혜 기대를 받아왔던 저PBR 대표 업종의 낙폭이 컸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워낙 시장 기대가 과도했던 만큼, 이번 발표가 그에 충족하기는 좀 어려웠던 것 같다"며 "그러나 기업 밸류업에 대한 시장 관심이 여전한 만큼, 시차를 두고 정부가 밝힌 정책 방향대로 진행된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 효과는 기업 체질 개선 차원에서 긍정적일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효섭 실장은 세미나 말미에 "저PBR주가 테마화 되는 현상에는 다시 한 번 우려를 표한다"며 "일본 동경거래소도 최근 기업 가치 제고 노력이 PBR을 무조건 1 이상으로 올리라는 취지가 절대 아니라고 강조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