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물길 작가. 김물길 작가 제공 김물길(36) 작가의 개인전 '비욘드 더 그린: 초록 너머의' 전시장(서울 강남구 아르떼케이)에 들어서자 봄내음이 물씬했다. 초록빛 자연을 담은 작품들이 벽면을 둘러쌌다. 공이 굴러오는 것처럼 소리 없이 다가오는 봄, 어느 순간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봄, 마그마가 분출하는 것처럼 폭발하는 봄이 저마다 싱그러운 기운을 뿜어냈다.
이번 전시는 신작 28점이 걸렸다. 지난 24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생각보다 더디게 오는 봄을 기다리면서, 이번 봄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을까 상상하면서 지난 4~5개월간 작업했다"고 말했다.
계절의 변화는 작가에게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다. "사계절이 있는 한국에서 태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계절의 변화에 민감해서 계절성을 표현한 작품을 많이 그려요."
출품작 중 '땅에 피는 노을'은 가을의 나무를 노을과 중첩했고 'Four Seasons Icecream'은 아이스크림에 사계절을 담았다. "봄(분홍색 아이스크림)이 녹으면 여름(초록색 아이스크림)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가을(바삭한 콘)이 기다리고 있죠. 세 계절이 지나면 겨울(콘 끄트머리 종이)이 오고요."
Spring Broom. 아르떼케이 제공 작가는 캔버스에 초록빛 자연을 많이 그리지만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상상이나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아 새롭게 창조한다. 전시 주제가 '비욘드 더 그린: 초록 너머의'인 이유다.
출품작 '찬란한 발견'은 어떤 일을 하든 헤쳐 나가야 할 순간이 있지만 그것이 모두 발견을 위한 과정이라고 다독인다. 'Moon Sailing'은 우리 모두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목적지가 불분명해도 걱정하지 말라고 토닥거린다.
"두 그림은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그렸죠. 제 그림을 보면 공감이 가고 위로를 받아서 좋아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사실 그림 그리면서 제 자신이 더 위로 받아요. 저에겐 작업 자체가 힐링이죠. 퀼트나 바느질을 하면 머리가 비워지는 것처럼 그림을 그릴 때 차분함과 평온함을 느끼니까 작업하는 시간이 너무 좋아요."
작업 스타일도 올빼미 형이다. 작가는 "보통 오후 3~4시쯤부터 새벽 2시 정도까지 그림을 그린다. 밤이 되면 마음이 차분해져서 집중력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김물길 작가. 김물길 작가 제공 작가의 삶에서 여행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다. 20대부터 시작된 여행의 경험이 작가로 활동하는 단초가 됐기 때문이다. 작가는 2011년, 673일 동안 5대륙 46개국을 혼자 여행하며 400여 장의 그림을 그렸고 2014년에는 한국을 일주하며 사계와 사람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담았다.
"대학교(경희대 회화과) 3학년을 마친 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로 여행 경비를 마련해서 세계 여행을 떠났어요. 낯선 곳에 있다 보니 세포들이 예민해져서 작은 것들에게도 영감을 많이 받았죠. 어렵게 돈을 모아서 온 만큼 하루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아서 보고 느낀 것을 매일 그림으로 그렸어요. 세계 여행을 갔다 온 다음 한국 여행을 떠난 것이 신의 한 수였죠. 한국을 떠나보니 한국의 소중함을 더 많이 느꼈어요."
작가에게 세계 여행과 한국 여행은 모두 특별한 의미가 있다. "현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보면서 심적으로 자유로워졌어요. 화가의 삶이 배고플지언정 안정적인 길을 좇기 보다는 제가 행복한 길을 찾자는 마음가짐이 보다 확고해졌죠."
'Pink Lake'. 아르떼케이 제공 My Oasis라는 작품에 현지 사막에서 가져온 모래를 뿌려 작업하는 모습. 김물길 작가 제공작가에게 여행은 일상이다. 작업 틈틈이 여행 가방을 싼다. 출품작 'Pink Lake'는 최근 남편과 남프랑스 무스티에생트마리 지역을 여행하면서 발견한 하트 모양 협곡에서 영감을 얻었다. 'Desert Vase'와 'My Oasis'는 작년 연말 다녀온 아부다비와 두바이 사막의 모래를 캔버스에 직접 붙여 작업했다.
"'Pink Lake'는 직접 본 풍경에 상상한 스토리를 더해서 그렸어요. 사랑을 찾고 싶어 사랑의 호수를 찾아간 소녀는 시간이 갈수록 '이 호수가 정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호수일까' 의심해요. 이 모습을 본 새가 소녀를 등에 태우고 하늘을 날며 '이 곳은 여전히 이렇게 빛나고 아름답단다' 초심을 되찾게 해주는 스토리를 화폭에 담었죠. 중동의 사막을 담은 그림들은 현지에서 며칠간 지낼 때 '사막이 메말라 보여도 밑으로는 촉촉한 물이 흐르기 때문에 이 곳에 사는 식물은 튼튼하고 깊게 뿌리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아서 그렸고요."
작가는 전시가 끝나면 바로 다음날 프랑스로 떠나 열흘 정도 머물다가 귀국해서 1주일간 재정비한 다음 뉴질랜드에서 보름 정도 지낼 계획이다.
"20대 때 세계 여행을 하면서 '자연이 아름다운 곳에 있을 때 스스로 가장 마음이 편안하구나' 느꼈어요. 저처럼 다른 사람들도 자연이 녹아 있는 그림을 보며 마음이 치유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초록빛 자연을 그리게 됐죠. 오랫동안 바라봐도 자극적이지 않은 작품을 그리고 싶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작업을 묻자 작가는 "회화의 스토리를 시각화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보고 싶다. 훗날 동화책도 쓰고 싶다"고 말했다.
'Sleep Well'. 아르떼케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