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오전 서울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윤석열 대통령의 의료개혁 관련 대국민 담화를 지켜보고 있다. 황진환 기자지난 2월 정부가 의대 증원규모를 발표하자, 곧바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돌입한 대한의사협회(의협)는
협상은 상대가 '수용 가능한 카드'를 던졌을 때 가능한 결과라고 정의했다. 김택우 의협 비대위원장은 같은 달 23일 공영방송에서 생중계된 의(醫)·정(政) 토론회에서 '2천 명은 한 발도 양보할 수 없다'는 정부의 태도가 대화의 가장 큰 걸림돌임을 지적했다.
반면 의료계의 '집단행동' 추이를 매일같이 브리핑해온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증원이 미뤄질수록 그 규모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며 "의료계에 '2천을 받을래', 아니면 '1천으로 줄일까' 등 흥정하듯이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맞섰다. 박 2차관은 한 달여 후인 지난달 29일에도 "다수의 국민이 원하는 의료개혁을 특정 직역과 흥정하듯 뒤집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즉,
정책적 결정은 이해당사자와의 흥정 또는 협상 대상이 아님을 명확히 한 것이다. "어떤 정책을 발표하면 (일단) 실력 행사부터 한다"는 비판적 발언도, 현 사태는 의료계가 정부의 확정된 결단을 따라야 종결될 수 있다는 인식을 깔고 있다. 과거 정부의 '불행한 역사'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공개 다짐도 여기서 나왔다.
의사 증원이 의료현안협의체의 산물이라기보다,
지역·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한 '의료 개혁'이란 점을 부각시켜 온 것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여러 사람의 논의를 하나로 묶어내는 협의(協議)가 상대의 존재를 상기시킨다면, 제도나 기구를 '뜯어 고친다'는 의미의 개혁(改革)은 주체를 강조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반대 세력이 '이권 카르텔'로 대상화되는 효과는 덤이다.
하지만, 당초 각오한 진통의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일까. 전공의 이탈 40일을 넘긴 의료공백에 지친 다수의 국민들은, 정부에게 진료 정상화라는 답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최근 환자·보호자들이 줄기차게 촉구하는 '실효성 있는 대책'은 모두 정부를 정조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2일 대구 한 대학병원에서 환자와 의료 관계자가 진료 접수대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모든 의료행위의 기준을 제시하고 방법을 결정할 의대 교수마저 사직을 천명하고 그 안에 국·공립병원에서조차 동조하겠다는 지금 도대체 어떤 비상시스템이 존재하는지 정부에 묻고 싶다. 2020년도 강경 대처했던 의협의 행태에서 정부는 진정 배운 게 없어 이런 카오스의 상황으로 의료진을 몰기로 했던 건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한국중증질환연합회, 3월 21일)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환자들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양측이 사태 해결을 위해 전혀 양보하지 않으면,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파국을 맞을 것이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3월 29일) 심지어 환자단체연합회는 "환자 입장에서는 (의료계와 정부 중) 어느 쪽의 주장도 완전히 찬성하거나 완전히 반대할 수 없다"고 했다. 사태 초기, 책임 소재와 비난의 화살이 의사들에게 쏠렸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지난달 말 동아일보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 남녀 1천여 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57.2%는 "증원하되 규모와 시기를 조정한 중재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답했다. 정부안(2천 증원)을 강행해야 한다는 응답은 절반 정도인 28.5%에 그쳤다. 특히 총선 판세를 가를 중도층에서 중재안을 찬성하는 비율(66.4%)은 정부에 우호적인 보수층(43.7%)보다 훨씬 높았다.
선거를 약 9일 남긴 시점에 등판한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이같은 시류를 고려한 승부수였을 것이다. 전날(3월 31일) 밤늦게 공지된 일정을 접하고 적잖은 기자들이 의대 증원 찬반을 떠나 정부의 전향적 카드를 기대했던 이유다.
의사 출신인 안철수 국민의힘 공동선거대책위원장 등 여당 내에서조차 '무조건 2천'만 고수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진 이후기도 했다. 당장 선거를 치러야 하는 입장에선 출구 없는 의·정 대치에 대통령 특유의 '불통' 이미지가 포개지는 정국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의협 비대위도 최고 통수권자의 '결자해지'를 요청한 상태였다(
"대통령께서 직접 이해당사자인 전공의들과 만나 현 상황의 타개를 위한 협의를 진행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해 달라").
기대는 현실이 되지 못했다.
무려 51분에 걸쳐 윤 대통령이 낭독한 A4용지 25장 분량의 담화문은 대부분 정부가 두 달 가까이 반복해온 증원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할애됐다. 지방의 필수의료 의사 부족, 고령화로 인한 의료수요 급증,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 등 수십 차례 정부가 언급한 논거들이다.
의대 2천명 증원 방침을 둘러싼 의정 갈등이 장기화되고 있는 1일 서울 중구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의료 개혁과 관련한 대국민 담화를 보고 있다. 박종민 기자무엇보다 '10년 뒤 전문의'가 아닌 지금 이 순간 '골든타임'을 지켜줄 의사들을 원하는 애타는 목소리에 대한 응답은 없었다. "정치적 득실을 따질 줄 몰라서 개혁을 추진하는 게 아니"라거나 "저는 공직생활을 할 때부터 대통령이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는 문장들에선 도취적인 확신도 일부 엿보였다.
국민은 당연히 당정의 '정치적 득실'을 위해 의사 수를 늘려달라고 한 적이 없다. 2천에 매달려선 안 된다는 여당 내 이견도 인내심이 임계치에 다다른 민심의 반영일 뿐이다.
윤 대통령이 유일하게 여지를 남긴 부분은
"증원 규모를 2천에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집단행동이 아니라 확실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통일된 안을 정부에 제시해야 마땅하다"는 대목이다. 문장에 대한 해석은 판이하게 갈렸다.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KBS 인터뷰에서 "2천 명에 매몰되지 않고 더 좋은 의견과 합리적 근거가 제시된다면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라며 유연성에 초점을 맞춘 데 반해 의협은 "이전의 정부 발표와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실망감을 드러냈다. 보건의료노조도 구체적 정상화 대안은 전무했음을 들어 "환자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고 혹평했다.
김성근 의협비대위 언론홍보위원장이 1일 서울 용산구 의사협회에서 열린 정례브리핑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이날 대국민 담화를 통해 밝힌 2천명 의대 증원의 필요성과 의료개혁 완수 의지를 피력한 것과 관련해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간 정부는 대화 추진 속도가 나지 않는 이유로 의료계를 대표할 소통 창구가 마땅치 않다는 점, 의대증원 관련 단일안이 부재하다는 점 등을 꼽아 왔다.
100% 틀린 말은 아니지만, 100% '맞말'도 아니다.점진적 증원 등 일부 각론을 제외하면 의사들은 의협과 대한전공의협의회, 교수(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 의대교수비대위 등), 학생(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 등
대체로 논의 자체를 '원점'으로 돌려야 한다는 데엔 큰 틀에서 동의했기 때문이다. 전공의와 의대생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반영하자는 공감대 아래 의협을 대표단체로 보는 컨센서스도 어느 정도 이뤄져 있다.
의료계가 대안을 제시했을 때 정부가 인정 가능한 '과학적 근거'의 내용도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되레 "의료개혁은 의사들의 소득을 떨어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이해집단의 저항에 굴복한다면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없다" 등의 발언은 불난 데 부채질한 격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의사들은 작금의 사태가 단순한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며 의사집단의 악마화를 중단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담화 이튿날인 2일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집단행동 당사자인 전공의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4일에도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유연한 처리방안'을 주문하며 국면 전환을 시도한 바 있지만, 아직 구체적 방안은 도출되지 않았다.
의대 증원이 정말 '국민을 위한 것'이라면, 사태 해결을 위한 진정성을 행동으로 보여줄 때다.
'전략적 모호성'을 '전향적 입장'으로 간주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