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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칼럼]지금까지 이런 정치는 없었다


    1997년 한보사태는 대한민국 역사를 뒤흔든 가장 추악한 경제범죄로 손꼽힌다. 사실상 IMF 금융위기를 격발시킨 사건이기도 하다. 회장 정태수의 몰락은 산업화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세무공무원 출신 정태수는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 분양으로 큰 돈을 번 뒤 사업을 확장해 한보철강을 설립했다. 문제는 온갖 불법을 저지르며 은행돈을 제 주머니처럼 여긴데 있었다. 당진제철소 건설을 명목으로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 등 정관계 유력인사들에게 뇌물을 주고 5조 7천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불법대출을 받다가 한보사태를 초래했다. 한보그룹 계열사가 줄도산하게 된 여파로 금융권에 자금경색이 가중되자 부채비율이 과도했던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쌍방울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기에 이르렀다.
     
    한보사태의 태풍이 몰아치던 1997년 2월 3일 오후 국회 귀빈식당에 여야 원내총무(현 원내대표) 3명이 마주앉았다. 신한국당 서청원, 국민회의 박상천, 자민련 이정무 원내총무가 모인 이유는 한보사태를 다루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문제 때문이었다. 쟁점사항은 3가지. 한보사태 국정조사특위 여야동수 구성, 특별검사제 실시, TV청문회 개최였다. 여당인 신한국당은 원내의석비율에 따른 특위구성과 특검제 및 TV청문회 반대 등 기존입장을 고수한 채 회담에 임했다. 이에 맞서 야당인 국민회의도 당일 오전 간부회의에서 강경방침을 재확인했다. 자민련은 국민회의와 궤를 같이 하지만 국회를 우선 소집하는데 관심이 컸다.
     
    회담에서 국민회의 박상천 총무는 당내 강경분위기와 달리 3가지 쟁점 중 특검제 요구를 철회하는 양보안을 제시하며 합의를 압박했다. 국민회의가 특검제 카드를 포기한 것은 야당 파트너인 자민련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자민련은 한보사태로 타격을 입은 충남지역 경제회생이 최우선 관심사여서 조기개원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결렬이었다. 신한국당 서청원 총무가 기존입장을 고수했다.

    우여곡절 끝에 여야 3당 원내총무는 2월 11일 다시 머리를 맞댔다. 국민회의는 3가지 쟁점 가운데 TV청문회 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할 마지노선으로 여기고 협상에 임했다. 결국 이날 총무회담에서 서청원,박상천,이정무 원내총무는 임시국회 소집과 국정조사특위 구성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국조특위 구성은 여당안인 의석비율대로 하되 TV생중계는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한보사태 국정조사와 청문회를 통해 한보그룹의 정관계 로비와 천문학적 뇌물의 실체가 드러났고 의왕 서울구치소에서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된 청문회를 통해서는 정태수 회장의 그 유명한 '머슴발언'을 비롯해 정씨의 부도덕한 면과 당시 사회의 부조리가 낱낱이 드러나는 성과를 거뒀다. 협상의 묘미가 없었다면 결코 이뤄내지 못할 일이었다. 신한국당 서청원 원내총무는 협상과 관련해 "여야 정치회담의 경우 서로의 입장이 뻔히 드러나있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려는 분위기 조성이 오히려 중요하다"고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윤창원 기자윤창원 기자 
    지금의 정치 현실은 어떤가? 22대 국회가 개원한 지 두 달이 지났건만 합의처리된 법안은 하나도 없다. 개원 이후 2370건의 법률안이 제출됐으나 본회의 문턱을 넘은 건 5건, 0.21%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해병대 채상병 특검법은 본회의 통과 뒤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폐기됐고, 5박6일 필리버스터를 거쳐 30일 통과된 '방송4법'도 대통령의 거부권행사가 확실시된다. 민주당이 다음달초 처리할 예정인 전국민 25만원 지원법과 노란봉투법도 비슷한 운명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그야말로 생산성 제로, 정치 실종의 국회다.
     
    정치가 실종되면 피해는 정치 서비스의 수혜자인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필리버스터가 이슈가 되지 못할 정도로 국민들은 정쟁에 등을 돌렸다. 그 흔한 당대표 회담이나 원내대표 협상이라는 단어는 정치기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다. 대화와 협상이 사라지고 거부권이 일상화되는 악순환은 이제 멈춰야 한다. 대결과 분열,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로는 대한민국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특히 이런 악순환에 민생과 직결된 정책 법안까지 희생된다면 결과는 끔찍하다.
     
    전쟁 중에도 협상을 한다는 데 이제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판단의 기준은 민심에 두면 된다. 국민적 관심이 높은 의혹사건 중 검찰이나 공수처의 수사에 한계가 있는 경우 특검을 도입해야 한다는게 민심일 것이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헌법에 명시된 입법부 견제장치이긴 하지만 과도한 행사는 오히려 더 큰 가치인 3권분립의 원칙을 침해할 수도 있다. 또한 야당이 입법독주를 한다면 그 역시 민심에 의해 심판받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정치는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시대상황과의 타협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는 측면에서 예술의 경지에 비유되기도 한다. 진흙탕 싸움의 작금의 정치를 예술에 견주기에는 터무니없지만, 정치의 수혜자여야 할 국민을 위해 우리 정치가 대화와 협상의 묘미를 통해 예술의 경지로 승화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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