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17일 오후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에 진료 지연 안내문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의대 2천 명 증원'에 따른 의·정(醫政) 갈등이 반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정부가 의료개혁 목적으로 공언한 '지역·필수의료 살리기'는 로드맵의 어디쯤 와있을까. 2025학년도 의대 증원 규모는 '1509명'으로 최종 확정됐지만, 강의실과 수련현장을 떠난 의대생·전공의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의사 수 확충이 정부가 필수의료 혁신을 위해 내건 필요조건이었음을 생각하면, 내년도 의사 국가시험 지원율이 11%에 그쳤단 점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7월 31일자로 마감된 하반기 전공의 모집 또한 아직 정확한 지원수치가 공개되진 않았지만, '빅5' 등 주요병원에서는 "(지원자가) 거의 없다", "(대외적으로) 얘기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등의 푸념이 지배적이다. 앞서 사직 처리된 전공의 수와 비등한 TO(7645명)를 충원하려던
수련병원들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면서도 곧 현실로 닥쳐올 전문의 기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당국이 월 1800억대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 중인 '비상진료'의 핵심인 중증·응급환자 대응은 지방 거점병원부터 무너지는 양상이다.
특히 '24시간 온콜(On-Call·호출 대기)'이 기본인 응급실은 업무 과부하로 인한 기존 전문의 사직 등이 잇따르면서 정상(적인) 가동이 거의 어려워졌다. 1일부터 응급실 진료를 축소하기로 한 세종충남대병원을 비롯해 순천향대 천안병원과 단국대병원, 국립중앙의료원(NMC) 등의 '응급실 파행'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에 대해 "응급의학과 외 다른 전문과목 인력을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 중"(7월 18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이라고 밝혔으나, 응급실 철야로 잔뼈가 굵은 의사들은 "응급실은 머릿수만 채워 놓으면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달 22일
"일부 병원의 응급실 파행은 단지 시작일 뿐 추가적 응급실과 의료계의 붕괴는 예정된 수순"이라며 현장 의료진은 당국의 인식에 이제 절망을 넘어선 '포기'에 접어들었다고 밝혔다.
CBS노컷뉴스는 응급의료법에 따라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지역 소재 권역응급의료센터에서 재난의료지원팀(DMAT) 팀장으로 재직 중인 교수 A씨의 목소리를 통해 응급의료가 처한 현실의 단면을 전하고자 한다. A 교수는 수도권 대형병원에서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마쳤고, 펠로우(전임의)를 거쳐 10년 넘게 현 근무지를 지켜왔다.
인터뷰는 '화장실 갈 시간도 아까울 정도'의 격무에 시달리는 A 교수의 상황을 감안해 서면으로 이뤄졌다. 그는 "의·정 갈등으로 인한 보건·응급의료 위기 상황에서도 정부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기보다, (당장) 중증·응급환자가 잘못될까봐 (여건 고려 없이) 일선 응급실에 환자를 적극적으로 받으라고 압박을 지속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Q. 공공병원을 포함한 많은 병원이 연이어 응급실 폐쇄 또는 진료축소를 겪고 있다. 소속 병원의 응급실은 어떤 상황인가.A: "권역응급의료센터다 보니 속한 권역 및 인접 권역의 중증환자를 전원(轉院) 받아 최종치료를 맡고 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 5명이 모든 근무를 커버하며, 하루 내원 환자는 80~130명에 이른다. 전체 환자 중 입원률은 25%로 관내 중증환자 수용률도 전국 평균에 비해 높은 편이다.
현재 (응급환자 분류도구인)
케이타스(KTAS·Korean Triage and Acuity Scale)상 1~3등급에 해당하는 중증환자를 의사 혼자 10~15명씩 보고 있는 상황이다(※편집자주: KTAS 1급은 심폐소생술(CPR)이 필요한 단계, 2급은 응급수술·시술 요망, 3급은 즉시 입원이 필요한 경우를 이른다).
6월 한 달 간만 280여 시간을 근무했다. 이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Q. 환자의 생사가 달린 응급실은 필수의료의 '최전선'이다. 올 2월 의대 증원 발표 전부터 피부로 느낀 '지속가능성의 위기'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A: "2024학년도 응급의학과 전공의 지원율은 79%로 지난 2022년부터 하락세다. 전문의 이탈도 늘고 있다.
전공의 지원율이 대폭 하락한 재작년부터 이미 응급의학과는 '붕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는 우려들이 나왔다. 여러 법원 판결로 인한 '사법리스크'의 부각,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현 세대와는 거리가 먼 근무형태, 미용 분야 및 비급여진료 위주 개원의와는 구별되는 진로의 불확실성 등이 원인이다. 특히 전공의들의 수련 중도 포기율이 타과 대비 매우 높고, 배출된 전문의 중 약 10%는 전공과 관계 없는 일반 개원을 하고 있는 현실이다.
현업에서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병원 내 환자 사망을 모두 의사의 잘못과 책임으로 돌리려는 사회적인 분위기,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높은 소송 건수와 기소율, 의료적 직무와 연관된 과실이 아님에도 의사 면허에까지 영향을 주는 개정 의료법 등이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확률상 피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징벌 등은 더 이상 이 일에 보람과 기쁨을 느끼기 어려워진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Q. 응급의료현장을 가장 떠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면.A: "최선을 다했음에도 환자가 안타깝게 돌아가셨을 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러한 감정은 근무가 지속되며 누적되는데, 감정소모와 스트레스가 매우 크다. 새벽 진료 중 주취자로부터 당하는 언어적·신체적 폭력, 조롱과 비아냥을 듣다 보면 '이 일을 왜 하나' 자괴감에 빠질 때도 많다.
환자나 보호자로부터 뺨을 맞는 일은 전공의 시절부터 부지기수였다. 경찰을 불러도 대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며 유야무야됐고, 사과 등을 받아본 적도 거의 없다. 금전적 어려움보다 근본적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지점이다.
거액의 배상금이 걸린 민사소송도 여러 번 당했다. 법리적 대응은 병원으로부터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았지만, 연봉 일부가 삭감됐고 억대의 배상금은 병원이 부담했다.
'애꿎은' 응급실을 압박해온 정부의 태도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신종 플루,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코로나19 등
신종감염병 유행위기 등에서도 응급의학과는 어느 과보다 정부에게 시달리며 각종 환자의 진료를 맡아 왔다." 지난달 29일 대구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관계자들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Q. 그럼에도 여태 응급실에 남아있는 이유는.A: "응급의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응급실을 지키는 것이 환자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란 사명감이 저를 붙잡고 있지만,
이제 정신적·육체적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전공의 대거 사직 때 우리 과 교수 대부분은 이미 사직서를 쓴 상태다. 개인적인 시기가 도래해 (사직서가) 수리되면 저도 쉬고 싶은 마음에 미련 없이 떠날 것 같다. 환자가 몰리는 오후에서 늦은 밤까지 중환자 열댓 명을 한꺼번에 보며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다 보면 점심·저녁을 거르기 일쑤다. 뒤늦게 라면이나 배달음식을 먹을 때가 많고,
화장실에 다녀올 시간조차 아까운 때가 많다. 때때로 전공의 시절보다 더 바쁘게 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Q. 숱하게 반복된 얘기지만 또다시 묻는다. 정부의 대규모 의대 증원이 '응급실(필수의료)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이유는.A: "의대 증원으로는 현재 당면한 의료 문제(필수의료 의사인력 부족 및 지방의료 수급 불균형)를 절대 해결할 수 없다. 크게 2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이번 의대 증원으로) 필수의료 지원이 늘어날 거라 생각하는 국민이 얼마나 되는지 되묻고 싶다. 이미
사교육계에는 반수, 재수 열풍이 불고 있는데 이 수험생들이 '바이탈'(vital)이라 불리는 필수의료에 지원하고자 직장을 그만두고 다니던 대학을 휴학·자퇴했을까. 기존에 (그와 같은) 전문과목을 지망한 전공의들이 모두 사직한 상황에서 (입시생들이) '굳이' 그 진료과를 하려고 의대에 들어오려 한다는 생각은 정부와 대통령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정책 내용상 필수의료과는 다른 과를 다 채우고 남은 이들이 지망하는 '낙수의사'로 폄하되기도 했다.
제가 일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수는 해마다 150여 명씩 나온다. 전국의 응급실과 응급센터를 모두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현재 특정분야에 의사 지원이 없는 이유가 의사 수 부족 때문이 아니란 것은 국민의 의료기관 이용률과 의사들의 근무시간 등을 고려하지 않아도 쉽게 유추 가능하다.
지방의 의료인프라 붕괴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업 혹은 정부기관 이전이 진행될 때마다 전출을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한데, 그걸(지방 복무를) 유독 의사직에만 강요하는 것이다.
지방에는 의사 이전에 사람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수도권 청년 구직자 10명 중 7명은 취업이 어려워도 '지방근무는 싫다'고 하고, 지방 발령을 기피하는 직장인이 대다수다. 연봉이 얼마나 되든 마찬가지다. 의사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동일한 판단을 할 것이다.
오랫동안 '바이탈 의료'에 몸담은 의사로서, 단순히 의사만 늘려서는 오히려 시장을 왜곡시켜 의료비 상승, 건보 재정의 빠른 고갈, 필수의료 위기 심화를 불러올 거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Q. 정부는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중증·응급 관련 수가 인상 등 의료계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해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서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강조한다.A: "응급실에서 실제로 근무하고 있는 전문의들에겐 설득력이 없다. 이때까지 30여 년에 걸쳐 서서히 붕괴되고 있는 응급의료를 보면서도 정부는 매번 같은 약속을 되풀이했다. '이번엔 다르다'면 어떤 재원으로 할 계획인가.
현 (의료공백) 상태를 겨우겨우 틀어막는 데만도 조(兆) 단위의 돈을 썼는데, 국민들은 여전히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며 불편해 하고 있다. (예산을) 얼마나 더 써야 할지 추산을 제대로 하지 않은 정책들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일례로, 전국의 모든 응급실과 응급센터는 1년마다 진료실적과 공헌도에 따라 평가를 받고 일정 지원금을 받고 있다. 약 250억여 원 정도인데, 이마저도 한시적으로 조성된 응급의료기금에서 나온다. 주된 재원도 매번 '땜질'로 겨우 갱신하며 연명 중인데 무슨 재정으로 (필수의료과 수가 인상 등을) 한다는 것인지 응급의료 종사자로서 의아하다.
또 (대통령 직속) 의개특위는 말 그대로 '논의'를 하는 조직일 뿐, 어떠한 법적 구속력이나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한시적 조직으로 한계가 명확하다는 뜻이다. 좋은 청사진만 제시하는 것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되기 쉽다. 최근까지도 응급분야 중환자 수가 보전율은 60~70% 선에 그쳐 병원에서 체감이 어려운 수준이다.
인상률로 (개선 성과를) 자평할 것이 아니라, 해당 수가를 발생시키기 위해 들어간 인적·물적 자원 등의 원가를 분석해야 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보상체계 공정성 제고 차원에서 행위별 수가 체계를 벗어나 최종적인 (환자) 건강결과 등에 따라 보상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점이다. 이는 명백히 해당 분야의 진료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에게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결과가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환자에 대해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치료를 포기할 확률이 크다는 의미다."
9월 수련을 시작하는 하반기 전공의 모집 마감일인 31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 노동조합이 게시한 교섭 요구안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Q. 소속 병원 응급의학과의 전공의 현황은 어떤가.A: "우리 과를 포함해 추가적으로 복귀 의사를 밝힌 전공의는 1명도 없는 것으로 안다. 내년마저도 (복귀 또는 지원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인연이 있는 전공의들과 가끔 통화를 하고 소식도 듣지만, 의정 갈등 국면이 완전히 해소되기 전까지는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들도 특별한 계획을 염두에 두고 사직하거나 수련을 포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저도 (이들의) 앞날을 세세히 알긴 어렵다."
Q. 정부는 전공의 복귀 여부와 무관하게 '전문의 중심 병원'으로의 전환을 꾀하겠다는 방침이다. 경증환자의 대형병원 쏠림 등을 완화해 전체 진료량을 줄이겠다고도 한다. A: "대다수 전공의가 사직했거나 수련을 포기했기에 이전 수준의 전문의가 배출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전문의 구인난은 심화되고, 그만큼 연봉 및 급여의 가파른 인상이 불가피해진다. 이는 일선 병원의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고, 특히 저수가 구조인 현 시점에서 경영 압박은 더 심해질 것이다. 전문의 인건비는 전공의의 몇 배로, (근로시간 등을 고려할 때) 근무 인원도 더 많이 필요한데, 이런 기본적인 논의조차 (제대로) 됐는지 의문이다.
짧게는 내년 2월 말, (길게는) 내후년까지도 현 상황이 갈 수 있다고 본다.
저는 소위 '바이탈 뽕'(의사가 환자를 살리는 데서 오는 자부심·사명감을 속되게 지칭한 말)에 의해 응급의학과를 지망해 지금까지 왔지만, 후배 의사들에겐 이런 척박하고 열악한 현실을 선뜻 권유하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