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이어지는 폭염과 열대야의 영향 등으로 전력 수요가 높은 수준을 기록 중인 가운데 7일 서울의 한 건물에 에어컨 실외기들이 작동하고 있다. 연합뉴스"어제 오후 4시쯤 30분 동안 가만히 있어도 머리가 핑 돌았어요. 택배기사 대부분이 그런 경험 있을걸요?"
체감 온도가 35도 안팎으로 오른 7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 주택가. CBS노컷뉴스는 9년차 택배 노동자 김현철(가명)씨와 동행하면서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 위험에 상시 노출된 옥외노동자들의 노동 실태를 직접 목격했다.
이날 오전 한때 소나기가 내려 습도까지 오르면서 푹푹 찌는 듯한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이런 무더위에도 김씨는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주택가 비탈길과 계단을 오르내리며 총 38가구를 돌아다니고, 택배 상품 54개를 배달하거나 수거했다.
기록적 폭염 속에서도 김씨는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12시간 30분을 일한다. 일과 중엔 명확히 정해진 휴게시간이 없어 몸에 이상을 느끼거나 점심 식사를 해결할 때 택배 차량에서 요령껏 쉬고 있다.
지난 7일 김씨가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서 택배 배송 일을 하고 있다. 주보배 기자김씨가 타는 택배 차량엔 빈 500밀리리터(㎖)짜리 생수병, 비타민 음료 등이 가득했다. 그는 "하루에 500밀리리터 생수를 5~6병 정도 마신다. 이렇게 물을 안 마시면 살 수가 없다"며 "무작정 더운 날보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 체력적으로 더 힘들다. 온도가 높은데 습도까지 올라 숨이 턱 막힌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온열질환 예방 가이드라인을 통해 체감 온도가 33도 이상 오르면 시간당 10분 휴식 시간을 제공하라고 권하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어 이런 조치들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배달 노동자를 비롯해 항공기 지상조업 노동자, 주차관리원 등 다른 옥외노동자들도 온열질환을 예방하려면 휴게시간과 휴게공간이 명확히 보장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인천국제공항에서 항공기 지상조업 업무 요원으로 일하는 A씨는 "열흘 전에도 동료 노동자가 장시간 업무를 하다가 눈동자가 풀려서 119구급차를 부른 적이 있다"며 "큰 사고는 막았지만 혹서기만 되면 간혹 노동자가 쓰러지는 사고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항공기 지상조업 업무는 항공기가 이륙하기 전 또는 착륙한 후에 비행기 화물칸에 짐을 싣거나 내리는 업무 등을 말한다.
그는 "정부에서 말하는 건 권고사항이고, 국가에서 법적으로 제한하지 않는 이상 민간 기업에서는 항공기를 띄워야 돈을 벌기 때문에 휴게시간이 늘거나 작업을 중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서울의 한 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서 만난 주차관리원 전모(20)씨는 "폭염일 때는 휴게시간이 1시간 늘어 총 3시간씩 쉬고 있다"면서도 "기온이 오를수록 노동 강도가 세지니까 휴게 시간을 더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플랫폼 업체에 소속된 배달 노동자들은 별도의 휴게공간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노동부 가이드라인이 그야말로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은 사업주는 근로자가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휴식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시설을 갖춰야 한다고 정하고 있지만, 플랫폼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 조항 적용 대상에서도 빠져 있다.
지난 7일 서울 중구 서울노동청 앞에서 라이더유니온 관계자들이 폭염과 산재 견디는 라이더 사회 안전망 강화 요구 기자회견에서 말하고 있다. 양형욱 기자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라이더유니온지부는 같은날 오전 10시 30분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에 기후실업급여를, 플랫폼 업체에 휴게공간 설치를 요구했다.
공공운수노조 전성배 라이더유니온서울지회장은 "플랫폼 회사는 쉼터를 마련해야 한다는 법적인 책임이 없고, 지방자치단체는 이동 노동자 또는 플랫폼 노동자에게 쉼터를 마련해야 한다는 조례가 있어야만 쉼터를 마련하는 상황"이라며 "정부가 노동 약자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겠다는데 이런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주시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지난 7일 서울 중구 서울노동청 앞에서 라이더유니온 관계자들이 폭염과 산재 견디는 라이더 사회 안전망 강화 요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양형욱 기자노동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현행 산안법과 정부의 온열질환 예방 가이드라인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권고 사항에 불과한 작업 중지권을 현장에 맞게 법제화하고, 휴게시설 설치 의무 대상을 모든 작업장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단체 환경정의 소속 오종관 활동가는 "폭염일 때는 노동자들이 작업을 중단할 수 있어야 하지만, 실외 작업 중지는 정부의 권고 사항이다보니 산안법 개정이 필요하다"며 "또 기상청이 발표한 체감 온도에 따라 실외 작업 중지 등이 시행되는데, 옥외노동자들의 체감 온도는 이보다 높은 경우가 많아 실외 작업 중지 기준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무법인 들꽃의 김세정 공인노무사는 "모든 사업장에 휴게공간 설치 의무가 적용되지 않는다. 건설 현장은 공사 규모, 인원수, 직종에 따라 휴게시설이 설치되지 않는 곳도 있다"며 "산안법상 작업 중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준이 구체적이지 않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다음 주에도 체감 온도가 35도를 넘나드는 폭염과 열대야가 지속될 것으로 예보됐다. 기상청은 "오는 10일부터 17일까지 최고 체감 온도가 35도 안팎으로 올라 무더위와 열대야가 나타나는 날이 많겠고, 대기 불안정으로 인해 소나기가 내릴 가능성이 있다"며 "아침 기온은 23~26도, 낮 기온은 30~35도로 평년보다 높겠다"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