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혬 작가가 반려견 '곰돌'과 작업실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다. 김민수 기자"일제강점기 이후 일본 문화가 유입되면서 요괴(妖怪ようかい) 설화가 한국에 많이 퍼졌어요. 우리에게도 전통적인 민담·설화 속에 도깨비나 귀신, 영물을 의미하는 신수(神獸)가 많은데, 잊혀지는 게 안타까웠어요. 우리에게 익숙한 뿔 달리고 뿔방망이를 든 도깨비 형상도 사실은 일본의 오니(鬼)의 왜색(倭色)이 입혀진 거에요."
판타지 웹툰 '백호랑'의 박혬(본명 박혜미) 작가는 일본의 '요괴'가 한국의 도깨비나 신수와 혼재되면서 한국의 토속신이나 영물, 신수(神獸)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며 안타까워 했다.
실제로 도깨비는 여러 민담이나 설화, 기록 속에서 다양한 형상으로 등장하지만 대체로 덩치가 크고 장난기가 많고 유쾌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그려진다. 요괴는 근대 일본 학자들이 민담·설화를 연구하며 다양한 귀신이나 괴물을 일컬어 '요괴'라는 용어로 정립했고, 거슬러 올라가면 마귀나 요괴라는 표현은 고대 중국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을 요괴라고 칭한다.
박혬 작가는 설화 속에, 책 속에서 잠자고 있던 토속적 캐릭터를 현대로 불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 7월, 4년에 걸쳐 인기리에 연재한 '백호랑'은 우리에게 생소한 신수들도 대거 등장한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보지 못하는 형상을 보는 능력으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박지룡은 어느 날 검은 형상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고 사신(四神) 중 하나인 '백호랑'이 나타나 구해준다. 인간계에서 영물과 신수들을 500번 하늘로 돌려보내야 승천할 수 있는데, 백호랑의 470번째 임무에서 박지룡을 구하게 되고 수호신이 되어 둘은 동거하게 된다. 이어 다양한 영물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박혬 작가는 '백호랑' 완결 직후 네이버웹툰 지상 최대 공모전에 나섰다. 플랫폼 직계약 작가의 경우 투고가 가능하지만, 영상시나리오 작가들과 의기투합해 조선을 점령한 역병의 원인을 추적해가는 종사관의 이야기를 그린 '점령'을 출품했다.
첫 창작 웹툰 '백호랑'을 제외하면 초기 작품들은 모두 시나리오 작가들과 함께 했다. 드라마와 로맨스에 이어 최근 오컬트 장르의 인기에 힘입어 공모전 출품작 '점령'도 함께 준비했다. 특징은 군더더기 없이 스토리 완성도가 높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 연출을 전공하고 독립영화와 상업영화계에서의 경험도 바탕이 됐다.
익숙하지만 생소한 '우리 이야기'를 발굴해 독자들의 호기심과 인기를 동시에 사고 있는 박혬 작가를 노컷뉴스 [만화인]이 만났다.
박혬 작가의 웹툰 '백호랑'과 '여고생 임연수'. 작가 갈무리 "세상살이 힘든 시대, 만화 보고 힐링됐으면…"
▶만화가가 되기 전에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꿨다고 들었다.= 공부보다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책 보기를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 그림을 좀 그려서 대회 입상도 하고 취미반으로 미술학원을 다녔는데, 고3이 되어서야 만화쪽으로 진로를 정했다. 애니메이션 연출이 하고 싶었다. 부산에서 다니던 대학교의 커리큘럼이 아쉬워서 자퇴하고 홍대에 있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애니메이션과에 진학했다. 여러 작품도 만들었지만 정작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이 어려웠다. 그림을 그릴 줄 알다 보니 동기들 독립영화나 상업영화 작품 콘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아쉬움이 컸을 텐데, 웹툰 작가로 입문하게 된 계기가 있나?= 애니메이션 감독하겠다고 공부할 때만 해도 웹툰 시장 규모도 작았고 제대로 된 유료화 모델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웹툰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더라. 웹툰도 결국 스토리텔링 구조 측면에서 영화나 드라마와 비슷한 면이 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동기들이 많은데 한 영상 시나리오 작가 언니가 모 웹툰 플랫폼 론칭 작품을 같이 해보자고 해서 첫 작품을 낸 게 '여고생 임연수'다. 이후에 '레이디악숀'도 했는데, 경험을 하고 나니 자신감도 생기고 무엇보다 나의 작품을 하고 싶어졌다. 사실 '백호랑'은 네이버웹툰 공모전 출품작이었는데 떨어졌다. 작품을 잘 봐주신 건지 얼마 후 네이버웹툰 PD께서 연락이 왔다. 연재 제의였다. '백호랑'은 2020년 5월 3일 연재를 시작했다.
▶'백호랑'에는 익숙한 캐릭터도 있지만 생소한 영물도 많이 등장한다. 어떻게 기획하게 된 것인가?= 나는 '퇴마록' 세대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서브컬처 장르를 좋아한다. 역사·민담·설화·종교·오컬트 적인 이야기를 좋아해서 그런 영물이나 토속신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신수(神獸)들이 인간처럼 살아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며 만들게 된 작품이다. SF 작가인 곽재식 작가님이 블로그에 연재 중이던 '한국 괴물 백과'를 정리해 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가서 작품에 참고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식으로 필요한 소재가 되는 책의 저자들을 찾아가 취재하고 도움을 받았다.
2024 네이버웹툰 지상최대공모전 2기 출품작 '점령' 2화 스케치 작업 중인 박혬 작가. 김민수 기자 ▶'백호랑'은 단순히 선과 악의 대결 같은 스토리 구조와 다른 것 같다.= 선과 악 이분법적으로 연출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흑백논리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구조상 정말 악한 빌런 캐릭터를 만들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대신 사람의 형상이 아닌 귀(鬼) 자체로 형상화 했다. 인간성은 복잡한데 이분화 하지 않으려다 보니 주요 캐릭터들의 성격이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를 달리는 측면이 있다. 의도적인 연출이다.
▶한국의 토속적인 신, 영물, 신수의 캐릭터를 발굴했는데, 단순히 '괴물', '요괴'와 다른 점들이 눈에 띈다.=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 문화가 유입되면서 '요괴'(妖怪ようかい) 설화가 한국에 많이 퍼졌다. 우리의 전통 민담·설화 속에 도깨비나 귀신, 영물을 의미하는 신수(神獸)가 상당히 많다. 한국의 토속적인 도깨비나 귀신, 신수는 서사가 있고 서로 존중하는 한국 특유의 정서가 있다. 반면 요괴는 이유 없이 사람을 헤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영화나 소설 등 작품에 등장하는 귀신은 다 사연이 있지 않나. 결국 사람 이야기다. '백호랑' 작품 속 빌런 캐릭터에는 '요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그래서 신수와는 구분된다.
신수에 대한 것 외에도 승려 의상이 들고 다닌 지팡이 나무가 신비한 '선비화'라는 설화라던지, 조선 전기의 명신 신숙주가 예지력이 뛰어났다는 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역사 인물을 모티브 삼아 픽션과 팩션으로 각색해 스토리에 담아내기도 한다. 민담·설화 속에 잠들어 있던 토속적인 캐릭터와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를 현대로 불러내 괴물이나 요괴와 또 다른 우리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 싶었다.
▶4년 간의 긴 연재가 끝났는데, '백호랑'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 졌으면 하나?= 사실 150화 정도 기획했던 작품인데, 예상보다 다양한 신수와 에피소드를 담으려다 보니 연재가 길어졌다. '백호랑'이는 '슴슴한 반찬'처럼 받아들여 주셨으면 한다. 입에 넣으면 '어, 이거 뭐지?' 하지만 목에 넘기고 나면 익숙한 맛처럼 느끼실 것이다. 요즘 자극적인 맛들이 많다 보니 제 독자분들은 저의 그런 만화를 좋아해주시는 것 같다. 공포 영화를 보면 재미를 느끼기도 하지만 정신적·심리적 스트레스가 크지 않나. 제 만화에 액션도 있고 강렬한 연출도 있지만, 슴슴하고 담백한 저자극 양념을 입힌 반찬찬처럼 스트레스 없이 봐주시길 바란다.
네이버웹툰 지상최대공모전 투고작 '점령'. 영상시나리오 작가들과 박혬 작가의 새 도전작이다. 네이버웹툰 갈무리 ▶'백호랑' 완결 직후에 바로 네이버웹툰 지상최대 공모전에 출품했다. 직계약 작가는 투고가 가능하지 않나?= 네이버웹툰 지상 최대 공모전(2기)에 점염병에 점령된 조선을 구하려는 종사관의 이야기를 그린 오컬트 장르 '점령'을 출품했다. 영화판에서 일을 했다 보니까 알고 지낸 시나리오 작가 분이 먼저 스토리를 보여주면서 함께 공모전에 내보자고 제안을 해주셨다. 개인적으로 역사물과 역병에 관한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된 것 같다. 현재 1화 심사 중이고 통과가 된다면 새로운관점의 오컬트를 보실 수 있을 것 같다. 혹시나 떨어진다면 개인적으로 구상했던 역병 재난 스토리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보완해서 투고 제안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른 차기작 구상이 있다면 귀띔해달라.= 사실 무당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찾아보고 있다. 하고 싶은 것은 한국적인 오컬트 웹툰을 선보이는 것인데, 다루려 했던 역병 소재를 지금 다른 스토리 작가와 공모전을 하고 있어서 당장 비슷한 소재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박혬 작가의 작업실과 반려견 '곰돌'. 김민수 기자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
=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애니메이션 연출을 하고 싶은데, 한국의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이 여의치 않아서 당분간 웹툰 작가의 길을 계속 가지 않을까 싶다. 여력이 된다면 애니메이션 연출은 꼭 해보고 싶다. 웹툰 시장에서 경쟁도 치열하고 뛰어난 작가도 너무 많다. 한국 콘텐츠의 전반적인 수준이 높다. 독자들의 트렌드도 빨라서 쫓아가기 너무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오컬트 장르를 지속해서 할 수 있는 힘을 키워가야 할 것 같다.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즘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만화를 보는 것이 취미도 있겠지만 현실의 괴로움을 잠시 잊을 수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독자분들 중에 제 만화를 보며 유난히 힐링이 된다는 말씀을 주시는 분들이 많다. 부디 제 만화를 보면서 걱정 없이, 모든 일이 잘 되시길 기원한다. 지금은 잠시 힘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곧 해결되지 않을까? 제 아버지가 편지를 써서 자주 보내주시는데, 이런 문구가 있다. '인생 별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