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와 기업에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 규제 동참에 대한 압박 강도를 키우고 있는 가운데 국내 반도체 업계의 고심이 커지고 있다.
현재는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첨단 반도체를 중심으로 미 정부가 수출 규제 참여를 촉구하고 있어 당장 매출 등에 타격이 크진 않지만, 대중 수출 통제 강도를 키울 경우 타격이 불가피하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고 기업들이 그동안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美 "HBM, 中 아닌 동맹에 공급해야"…반도체 수출 통제 참여 촉구
1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앨런 에스테베스 미 상무부 산업안보차관은 10일(현지시각) 워싱턴DC에서 열린 '2024 한·미 경제안보 콘퍼런스'에서 "세계에 HBM을 만드는 기업이 3개 있는데 그중 2개가 한국 기업"이라며 "HBM 역량을 우리 자신과 동맹의 필요를 위해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미 상무부는 "미국의 국가 안보와 기술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하는 위협 환경을 지속 평가하고 수출 통제를 업데이트할 것"이라고 말해왔는데 이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요구를 내놓은 것이다.
앞서 미 산업안보국(BIS)은 5일 양자 컴퓨팅과 첨단 반도체 제조 등의 핵심 신흥 기술을 수출 통제 대상으로 지정하는 임시 최종 규칙(IFR)도 발표했다. 이런 기술은 미국에 준하는 수준의 수출 통제 체제를 갖춘 국가에는 허가 없이 수출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에 대해서는 허가를 받으라는 취지다. 미국에서 첨단 기술과 장비를 들여오고 싶다면 대중 제재에 동참하라는 압박인 셈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은 해당 기술에 대해 수출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는 '수출 통제 시행국(IEC)'에는 들지 않아 일각에서는 국내 반도체 업계가 해당 규제와 관련해 사업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이에 대해 정부와 업계에서는 한국은 수출 허가 신청 때 '승인 추정 원칙'을 적용하는 원칙적 허가 대상이기 때문에 BIS의 발표가 미칠 영향은 미미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식적인 대응도 자제하는 등 조심스러운 분위기도 감지된다. 하지만 이후 미 정부가 대중 반도체 제재 참여를 연이어 압박하고 나서면서 고민이 더 깊어지는 모양새다.
악마는 디테일에…HBM 규제 대상 몇 세대 포함될지 주목
국내 반도체 업계는 HBM 규제 대상에 몇 세대 제품이 포함될 지가 관건이라고 보고 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최첨단 5세대HBM(HBM3E)을 생산하고 있는데 해당 제품에 대한 고객사는 미국 기업뿐이다. 규제 대상에 5세대 HBM만 포함된다면 국내 반도체 업계에 미칠 영향은 거의 없는 셈이다.
하지만 HBM 규제 대상에 구형 제품이 포함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이두와 텐센트 등 중국 기업들이 삼성전자의 3세대 HBM(HBM2E) 등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엔비디아는 미 정부로부터 중국용으로 H20에 대한 수출 허가를 받아 판매중인데 이 제품엔 삼성전자의 HBM3가 들어간다. 미 정부가 H20 수출까지 막는다면 삼성전자의 타격의 불가피하다.
삼성전자는 자체 개발 중인 AI 추론용 가속기 '마하 2'(가칭)를 바이두 등에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가 길어질 경우 이런 계획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다. SK하이닉스도 환영할만한 조치는 아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제재가 길어질 경우 HBM 시장 전체 규모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만큼 두 회사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은 더 커질 전망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HBM 시장 규모는 약 170억달러(우리돈 약 23조원)이고 이중 10%는 중국인데, 최첨단 HBM에 대한 중국 판매가 제한될 경우 중국 빅테크 기업들이 '큰 손 고객'으로 부상할 시점은 늦어지게 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발표된 내용을 보면 당장 매출과 수익 등에 타격을 미칠 정도는 아니지만 미중 갈등이 장기화되면 우리 기업에 직·간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업체의 업체의 피해도 우려된다.
대외경정책연구원 정형곤 선임연구위원이 관세청 무역 통계를 바탕으로 국가별 반도체 산업 수출 동향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국내 반도체 산업 수출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는 중국(35.8%)으로 468억 9700만달러를 수출했다. 홍콩(14.1%) 수출 대부분이 중국으로 재수출 되는 점을 감안하면 반도체 수출 중 절반은 중국인 셈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물론 반도체 중견, 중소, 소부장 업체 중 상당수가 중국에 수출하고 있는데 미국의 대중 규제 대상이 범용 제품으로 확대될 경우 국내 반도체 산업 전반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 규제 수위 낮추며 적용 시점 지연에 집중…시간 번 기업들, 준비"
전문가들은 정부가 규제 수위를 낮추는 데 집중하고, 적용 시기를 최대한 늦추는 데 주력하되 최악의 경우를 감안해 우리 정부가 선제적으로 수출 규제에 나서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HBM 등 첨단 반도체 제품에 대한 수출 규제는 받아들이되 범용, 구형 제품은 수출 규제에서 제외하는 식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김혁중 부연구위원은 "대중 무역 규제의 대상과 범위를 최소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규제가 확정되더라도 적용 시점을 최대한 미뤄서 정부가 기업들이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며 "수출 규제 적용이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했을 땐 미국이 수출 대상과 범위를 정하고 직접 통제하기 전에 우리 정부가 국내 산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품목들을 먼저 제안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대중 수출 규제 뿐만 아니라 미 정부가 중국을 겨냥한 수입 규제도 강화하고 있는 만큼 이를 대비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한국무역협회 한아름 수석연구원은 "미국 정부의 수입 규제는 강화되는 추세인데 중국산 제품의 우회 수출지로 한국도 지목된 상황"이라며 "향후 중국산 부품을 쓴 제품에 대한 수입 규제 등 공급망 전반에 걸쳐 제재가 강화되는 상황을 대비해 범용 반도체 제품, 부품을 생산하는 국내 기업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지원을 하는 방안도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첨단 기술 개발에 대한 견제가 강해지면서 중국이 기술 자립에 드라이브를 거는 만큼 우리 기업도 대응책 마련에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부연구위원은 "중국의 기술 탈취 시도에 대한 대응도 중요한데 현지에 진출한 기업들은 주의가 필요하다"며 "중국은 분명히 큰 시장이지만 미중 갈등을 거치며 제품과 장비 국산화에 주력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우리 기업들도 중국 외 시장 개척에 공을 들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