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구로구청 홈페이지. 서울 구로구청 홈페이지의 구청장 공약이행 실적 점검판. 46.6%까지 올라갔던 공약이행률은 지난 17일 '0%'로 바뀌었다. 구로구가 추진해오던 75개 공약사업들이 하루아침에 '초기화'된 것이다.
급기야 다음날인 18일에는 이행실적 자체가 홈페이지에서 사라졌다. 덩달아 거리공원 지하주차장 건립, 구로차량기지 이전문제, 재개발·재건축 적극 추진 등 그동안 드라이브가 걸렸던 현안 사업들의 향배도 안갯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 모든 사태는 지난 16일 문헌일 구로구청장이 "오늘부로 구청장직에서 물러나고자 한다"며 전격 사퇴를 발표하면서 비롯됐다. 공약사업을 왕성하게 추진하며 몇 달 전에는 공약이행 평가 최고등급까지 받았던 그가 갑자기 직을 내려놓겠다고 발표한 이유는 그의 170억원에 달하는 '주식'때문이었다.
문 전 구청장은 지난 1990년 구로구에 '문엔지니어링'이라는 정보통신 설비회사를 설립한 설립자다. 그가 보유한 주식은 4만8000주로, 평가액이 17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3월 인사혁신처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는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문 구청장이 보유한 문엔지니어링 주식이 업무와 상충되는 측면이 있다고 판단해 백지신탁을 결정했다. 문 구청장은 이 결정에 불복해 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패소하면서 백지신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자, 결국 공직을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그가 백지신탁을 미루며 소송으로 끌고 가는 동안 그의 재산은 취임 초기인 지난 2022년 9월 기준 143억원에서 지난 3월 196억원으로 53억원이 불어났다. 그가 구청장을 지내는 2년 동안 백지신탁을 미룬 그의 회사 주식 가치가 크게 상승한 것인데, 구청장 봉급도 받고 주가상승도 챙겼다는 비판이 곧바로 제기됐다.
문헌일 전 구로구청장. 구로구청 제공 게다가 그가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 쪽을 택하면서 정작 주민들에게는 내년 4월 구청장 보궐선거 비용 30억원을 떠안긴 점도 지탄의 대상이 됐다.
시민단체 활빈단은 18일 "구민은 안중에 없고 자신의 재산만 지키려는 후안무치한 행동"이라며 "양심이 있다면 보선비용을 구로구청에 내놓고 재임 중 받은 봉급도 전액 반납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야당도 책임론을 제기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 16일 "구청장이 돈 많은 사람들이 하는 취미활동인가. 자기돈 170억원은 귀하고 국민돈 수십억원은 흔한가"라며 "국민의힘은 엉터리 공천에 대해 사과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공세에 나섰다.
문 구청장의 사퇴는 소속 당인 국민의힘에서도 사전에 알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힘 구로구당원협의회는 사퇴 발표가 나오자 "문 전 구청장을 공천하고 선출되게 한 책임을 통감하고 주민들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초유의 구청장직 사퇴로 구로구는 16일부터 엄의식 부구청장 권한대행 체제로 운영 중이다. 주요 공약사업들이 모두 초기화된 가운데 당분간은 신사업보다는 상황관리 수준에서 구정이 운영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문제는 내년 4월 보궐선거로 당선될 새 구청장도 잔여임기가 1년 남짓 밖에 되지 않아 당선 후 곧바로 선거준비 모드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구청장의 전격 사퇴로 구로구는 당분간은 장기적인 발전전략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