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하는 함용일 금감원 부위원장. 연합뉴스결국 금융당국이 '고려아연 사태'에 참전했다. 주가 폭등 과정에서 벌어진 불공정거래 의심 사안 등에 대해서는 이미 모니터링을 시작했지만, 유상증자 등 기업 운영상 결정에 끼어든 건 지난 9월 경영권 분쟁이 본격화된 후 두 달 만이다.
시장에선 이번 사태가 한국 증시의 민낯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기업의 호실적에도 수년간 눌려있던 주가가 반응한 건 경영권 분쟁이라는 일회성 이슈였고, 그 과정에서도 경영진의 기습적인 유상증자 결정이 기존 주주들의 반발을 샀다. 이에 금융당국이 기업 활동에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튼튼한 밸류에도 꿈쩍 않던 K-증시, 사건·풍문에 움직여
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9월 초 53만원 안팎에서 거래되던 고려아연의 주가는 두 달 만인 지난 10월 29일 154만3천원(종가)까지 올랐다. 고려아연이 70만원을 넘어선 것은 1990년 증시에 상장한 후 이번이 처음이다.
기업의 영업과 재무상태에 큰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2015년 4조7710억원이었던 고려아연의 매출액은 매년 성장해 2022년엔 11조2190억원, 지난해엔 9705억원을 기록했다. 지난 10년간 매해 당기순이익도 최소 5천억원 수준에서 많게는 8천억원을 넘겼다. 순자산도 계속 늘어 지난해엔 9조6420억원에 달했다.
연합뉴스 반면 건실한 실적에도 주가는 내내 40만~60만원 사이에서 움직이며 큰 등락이 없었다. 주가순자산비율(PBR)은 1~1.2배에 머물렀다. 지난 5월 한국거래소에서 조사한 코스피 상위 200개 기업의 PBR이 1.0인 것과 같은 상황이다. 주요 선진국 상장사들의 PBR이 3.2, 중국·대만·인도 등 신흥국도 1.7인 것과 비교하면, 주식시장에서 제대로 기업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국내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한국 증시는 유독 기업의 체질이나 미래 사업성, 업계 상황 등 합리적 분석 자료가 아니라 일회성 사건이나 풍문에 더 휘둘린다"며 "이런 사태가 반복될 때마다 밸류에 투자하는 자금이 떠나니 악순환이 더 심해진다"고 지적했다.
주주이익 뒷전인 기업, 반복되는 당국 개입…불신 키워
한국증시에서만 볼 수 있는 당황스러운 풍경은 눌린 주가만이 아니다. 지난달 30일 금융감독원은 고려아연이 유상증자 계획을 공시한 다음날 기자간담회를 열어 증권신고서 정정 또는 보완 필요성을 강조하며 주주보호에 나섰다.
당초 고려아연 이사진은 빚을 내 공개매수를 추진하면서 취득한 자사주는 소각해 환원하겠다고 주주들을 설득했는데, 불과 며칠 만에 기존 주주들의 주식가치를 희석하는 일반공모 유상증자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유상증자 자금 대부분이 차입금 상환에 쓰인다는 점도 논란을 더했다.
당장 시장에선 "주주환원은커녕 주주들의 지갑을 털어 자기 지분을 늘린 것", "차입으로 공개매수 하고 빚은 주주들이 갚으라고 영수증을 보냈다",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게 한국 증시"라며 비판이 쏟아졌다.
함용일 금감원 부원장은 "차입해서 자사주를 취득하고 소각하겠다고 하고 그 후에 유상증자를 해서 상환한다는 계획을 고려아연 이사회가 다 아는 상태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만 시킨 것이라면, 기존의 공개매수 신고서에는 중대한 사항이 빠졌거나 허위·위계 등 부정거래의 소지가 다분하다"고 지적했다.
고려아연 측은 "자기주식 공개매수 종료 이후 일반공모 증자를 검토했다"며 주주를 기만했다는 의혹에 선을 그었지만, 이미 시장의 신뢰를 크게 잃은 상황이다.
자산운용사의 한 운용역은 "일반주주 이익에 반하는 경영판단과 이에 대해 '불가피하게' 이뤄지는 금융당국의 개입까지 모두 국내 상장기업에서 수없이 반복된 일"이라며 "해외 투자자들 입장에선 한국 증시를 피하게 되는 큰 불확실성 요소"라고 지적했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상법 개정 목소리 커지나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박기덕 고려아연 사장. 연합뉴스고려아연 사태가 국내 증시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다시 드러내면서,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의 이익 보호까지 확대하는 상법 개정의 필요성도 다시 주목받을 것으로 보인다.
기업거버넌스포럼은 논평을 통해 "(유상증자 계획은) 회사의 주인이 전체 주주라고 생각한다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이라며 "고려아연 일개 기업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고려아연 사태는 상법 개정이 반드시 필요함을 다시 일깨워줬다"며 "이사가 회사와 지배주주에만 충실하면 제2, 제3의 '고려아연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