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신록이 연기한 범동은 원래 각본에서 남성 역할이었다. '지옥'에서 김신록 연기를 인상 깊게 본 김상만 감독이 그에게 제안하면서 여성 역할로 재해석됐다. 김 감독은 "대사 하나 바꾸지 않았는데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풀어냈다"고 감탄했다. 넷플릭스 제공연기. 배우가 배역의 인물·행동 등을 표현한다는 의미다.
배우 김신록이 바라본 연기는 이렇다.
"세상을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도구인 것 같아요. 다양한 삶을 살아온 인물을 연기하면서 저 또한 지평이 넓어지고요. 그게 배우로 살아가는 사람의 행운이 아닐까요."
알다시피 김신록은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재학 시절 동아리 활동을 통해 연극 무대에 섰다. 그러다 연기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여기에 연기 수업을 집중적으로 받고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 예술전문사를 취득하더니 2년간 유럽·미국의 극단을 탐방하기도 했다.
이처럼 연기를 대하는 열정만큼은 남다른 그가 넷플릭스 영화 '전,란'에서 범동을 표현했다. 범동은 천민이면서 7년간 이어진 왜란의 혼란 속에서 치열하게 생존해 온 인물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김신록은 "범동은 7년 전란에 살아남은 민중의 얼굴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며 "김자령(진선규) 장군의 왼팔로 보이길 원했다"고 떠올렸다.
이어 "이 인물이 화전민 출신이라 산에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면서 야생동물도 잡고 칡도 캐 먹겠다고 생각했다"며 "계산적이거나 지적으로 보이기보다는 본능적이고 직관적이고 충동적으로 보이길 원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범동이,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자네가 옳았네'라는 자령의 대사가 범동이 해야 할 목적을 잘 표현해 준 것 같았다"며 "이 장면으로 범동이 더 빛났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첫 사극에 첫 액션…"범동의 답답함 표현하려 해"
영화 '전,란'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전후 상황을 다룬 영화다. 왜군의 기습으로 선조(차승원)가 백성을 두고 도망치는 가운데, 백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걸고 왜군과 싸운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다. 조선 최고 무신 가문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은 신분을 뛰어넘은 우정을 나누지만, 결국 적으로 만나기에 이른다. 넷플릭스 제공김신록은 작품 속 범동이 한양으로 가는 김자령과 천영을 만류하는 장면에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트로이 공주 카산드라의 심정을 언급했다.
카산드라는 아폴론 신에게 설득력을 빼앗긴 비운의 예언자다. 그는 트로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놓아선 안 된다고 예언했지만, 이 말을 믿지 않은 트로이 왕국은 결국 멸망하기에 이른다.
김신록은 "으매 답답혀, 으매 울화여"라는 범동의 대사를 읊으며 "매 순간 예언하지만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답답함을 잘 표현해 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 눈에 뻔히 보이는 것들을 책으로 세상을 배운 저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점에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 같았다"고 덧붙였다.
SNS, 온라인커뮤니티에는 "왜놈들하고 붙어 싸운 백성들은 시체를 뜯어 먹으면서 연명하는디 왜놈들하고 붙어먹은 양반들은 갈비를 뜯어 가면서 잔치를 벌여 부러야. 둘 다 똑같이 괴기다, 이 말이여?"라는 범동의 대사가 공유 돼 눈길을 끌기도 했다. 넷플릭스 제공영화 '전,란'은 김신록에게 있어 첫 사극이면서 첫 액션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부담감보다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다고 밝혔다. 액션 연기에 대해선 카메라 기법과 편집 기술에 공을 돌렸다.
그는 "범동의 액션이 천영의 액션과 달리 투박하고 거칠게 설계돼 있어 호탕하고 기개가 있어 보이는 방식으로 (접근)했다"며 "연기하는 대로 카메라에 잘 담겨서 빛을 본 거 같다. 그런 묘미를 맛본 건 처음"이라고 겸손해 했다.
김신록은 김상만 감독과의 호흡에 대해 "처음으로 함께한 작업이고 제게는 첫 사극인데 (감독님이) 위화감 없이 현장을 이끌어주셔서 감사하게 작업했다"며 "전혀 권위적이지 않으셔서 함께 하기 정말 좋았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어 "눈과 귀가 밝은 감독님"이라며 "포스터 작업도 해오시고 그래픽 쪽에도 굉장히 능하시다. 미장센을 보는 눈이 굉장히 뛰어나시더라"고 감탄했다.
"강동원과 어깨 나란히 할 수 있는 배우 아닌데…"
영화 '전,란'은 김신록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사극과 액션에 처음 도전하는 작품일 뿐 아니라, 넷플릭스와 함께한 첫 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그의 첫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의미를 더했다. 넷플릭스 제공그는 동갑내기 강동원과의 친분을 얘기하기도 했다.
김신록은 "영화를 보면서 정말 한국 영화의 보배라고 생각했다"며 "그렇게 유려한 몸동작을 할 수 있는 배우는 한국에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라고 극찬했다.
이어 "내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배우가 아닌데 촬영할 때 그걸 미처 모르고 친하게 지냈구나 라고 생각했다"며 "되게 편안하고 다정하다"고 웃었다.
김신록은 최근 근황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수영과 발레를 배우고, 목소리 레슨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수영은 과거 수영 선수 출신 인물 대본을 받아본 적이 있어 고사했는데, 이런 역할이 다시 들어올 수 있으니 배우로서 준비가 좀 돼 있고 싶었다"며 "발레는 멀리 바라보며 운동 삼아 배운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목소리 레슨은 목도 하나의 신체 기관이라서 나이 들면 발성기관이 달라진다"며 "일종의 트레이닝을 계속해야 소리의 퀄리티도 유지돼 직업적으로 훈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지난 5월 생애 첫 팬 미팅 '오월의 신록'을 연 소감을 밝혔다. 그는 "무대에서 관객을 보는 경험은 새롭지 않은데 저를 보러 시간과 돈을 들여서 오시는 게 생경한 경험이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어 "유치원 때 이후로 이렇게 맹목적으로 사랑을 받아본 게 처음인 거 같다"며 "신기한 경험"이라고 기뻐했다.
이같은 팬들의 사랑에 김신록은 '연기'로 보답하겠다고 강조했다.
"팬들이 저에게 원하시는 건 의외의 인물로 연기를 잘 해주기를 바라시는 것 같아요. 작품 속에서 저를 보는 기쁨이 있으신 거겠죠.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은 연기를 잘 해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수 있도록 힘 있고 밀도 있게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한편 지난달 11일 공개된 영화 '전,란은 2주 차에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영화(비영어) 부문 3위를 차지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 카타르, 대만 등 7개 국가에서 1위를 기록한 데 이어 총 74개 국가에서도 톱10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