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혜인씨. 강지윤 기자"무너져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뭐 그런 걸로 그래?' 할 수도 있죠. 그런데 실패가 반복되면, 진짜 지쳐요."
일하던 카페에서 매니저로 승진한 지 3개월. 김혜인(가명·25)씨는 갑작스러운 권고사직을 당했다. 자의와 타의 사이에 은둔과 고립이 시작됐다. 이후 작년 겨우내 방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고립·은둔 청년 쉼터 '두더집'에서 만난 혜인씨.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은둔하게 된 이유를 전했다.
"30분씩 일찍 출근하고, 퇴근도 늦게 하면서 정말 최선을 다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고 하니까…. 배신감과 회의감이 몰려왔어요.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도 어려웠고요."
누군가에겐 대수롭지 않을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혜인씨는 그날부터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부족해서'라는 생각이 혜인씨를 외롭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앓은 우울증이 심해졌다.
혜인씨는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에 머물렀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상태가 지속됐다.
고립·은둔 벗어나고 싶다 80%…'안전한 목적지' 늘어야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두더집'에서 은둔 청년과 관계자들이 설을 맞아 전을 부치고 있다. 강지윤 기자혜인씨와 같은 고립·은둔 청년은 전체 청년의 5%인 약 54만 명(2023년 발표 기준)으로 추산한다. 이중 '은둔 청년'은 24만 명.
'고립'은 위기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관계 자본이 부족·결핍된 상태를, '은둔'은 그중에서도 거주 공간에서 외출이 거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게으르거나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편견과 달리 청년들은 일자리 부족, 과도한 능력주의, 사회적 관계의 어려움 등에 의해 '고립과 은둔'으로 내몰린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3년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립·은둔은 대체로 20대 청년기에 시작됐다. 취업 등 직업 관련 어려움(24.1%), 대인관계(23.5%) 문제로 인한 경우가 다수였다. 고립·은둔 청년 80.8%는 현재 상태를 벗어나길 원했고 탈고립을 시도한 경험이 있는 청년도 62.7%나 됐다.
'두더집'을 운영하는 사단법인 '씨즈' 이은애 이사장은 청년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생활 동선 안에 작은 센터 여러개가 생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고립·은둔 청년이 기존의 생활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외출할 수 있는 '안전한 목적지'가 필요한데 먼 곳보다는 가까운 곳이, 대규모보다는 소규모가 접근성과 안정성 측면에서 좋다.
이 이사장은 "공공이 만든 광역센터형 모델은 (일자리, 심리상담 등 전문기관에 연계해 주는) 허브가 되기보다 직접 사업을 하며 공급자 중심으로 관료화될 위험이 있다"며 "최소한 자치구마다 청년들이 교류할 수 있는 거점센터가 생긴다면 지역 내 일자리와 청년을 연결하기도 수월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고립·은둔 청년들의 삶의 속도, 생각의 속도는 조금 느리다. 그 느림이 보장되어야 한다"며 장기적 관점의 지원을 강조했다.
고립에서 자립으로…"맞춤형 일자리 필요"
SNS에 두더집 활동을 공유 중인 이승연씨. 강지윤 기자고립청년 이승연(가명·30)씨의 새해 소원은 '자랑스러운 첫째 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일을 구해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리고, 신뢰를 회복하고 싶다"고 밝혔다.
승연씨는 자신을 7년째 니트족(학생도 직장인도 아니면서 구직 활동을 위한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렇다고 쭉 백수로 지낸 것은 아니다. 허리가 아파 관두기 전까지 약 2년 동안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다.
"저보다 어린 주방장이 혼을 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꾹꾹 참아가면서 일했어요. 왜 빨리 일을 구하지 않냐고요? 무섭거든요. 무섭지 않은 일자리가 있으면 좋겠어요."
한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3분기 국내 청년층(25~34세) '쉬었음' 인구는 42만 명. 이 중 '자발적 쉬었음'과 '비자발적 쉬었음'은 각각 28.2%, 71.8%로 나타났다.
'쉬었음'으로 분류된 청년이 반드시 고립·은둔 상태인 것은 아니지만, 고립·은둔 청년은 경제활동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고립·은둔 기간이 길어질수록 사회성과 업무 수행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일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재고립 되기도 한다.
고립·은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단계별 훈련과 맞춤형 일자리에 대한 필요성이 나오는 이유다.
이은애 이사장은 "고립 기간이 짧은 니트족은 정부의 취업 지원 정책을 통해 비교적 쉽게 자립할 수 있다. 하지만 고립·은둔이 장기화된 청년들은 직무 능력뿐 아니라 소통 능력도 미숙해 취업 후에도 문제가 줄줄이 터져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ADHD, 경계성지능장애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친구들도 '은둔·고립'이라는 하나의 이름 안에 있다"며 "이런 어려움을 가진 청년들도 고려한 일자리 지원 정책 개발도 시급하다"고 밝혔다.
이은애 이사장은 청년들의 성향이 강점이 될 수 있는 '적합한 일자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아주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기질의 한 친구는 지금 세무 회계 쪽으로 취업해 긍정적 피드백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