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빙 다큐멘터리 '라이프 라인'을 연출한 김성민 감독은 작품 공개 후 소방관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직업적인 스트레스가 전달되면서 가족들이 간접적으로나마 공감해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티빙 제공트라우마. 사전적 의미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뜻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사체를 수습하고, 동료의 희생을 경험하는 소방관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들에게 치료는 먼 이야기다. 현실을 애써 외면한 채, 소방관들은 또 다른 현장으로 출동한다.
티빙 다큐멘터리 '라이프 라인'의 제작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소방관들과의 동행만 자그마치 4년에 달했다. 김성민 감독은 촬영 내내 신중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호흡곤란이 오시더라고요. 그 정도로 너무너무 고통스러워하셨어요."실제로 촬영을 중단한 적도 있었다. 김성민 감독은 최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티빙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이 전화기 너머로도 강하게 전달됐어요. 인터뷰가 '트리거'가 될 가능성을 고려해 심리 전문가분들과 함께 진행했습니다.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티빙 다큐멘터리 '라이프 라인'을 연출한 김성민 감독. 박종민 기자그는 "소방대원들이 겪는 트라우마가 심각한 질환이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며 "다만 이들의 상황이 자극적으로 소비되거나 휘발되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김 감독도 결국 한 소방관의 트라우마와 마주하게 됐다. 그는 "가장 친했던 동료의 순직을 기억 못 하시더라"며 "10년 넘게 이 일을 해왔지만, 그 짧은 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이어 "아내 분께서 나오시면서 남편을 타박했다"며 "그 장면을 촬영하고 싶었지만, 남편의 표정이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고 덧붙였다.
"지금 이분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우실까를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내와 충분히 대화하고 나서 마음의 정리가 된 한 달 뒤 인터뷰를 다시 진행하니 본인이 잊고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해당 장면은 '라이프 라인' 6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터뷰 당시 소방관과 그의 아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소방관은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저도) 놀랐다"며 끝내 눈물을 훔쳤다.
"소방관들 사명감으로 버텨…트라우마 회피해"
김성민 감독은 '라이프 라인' 제작 당시 이해관계가 없는 소방관들을 찾기 위해 블로그 등을 통해 물색했다. 그러다 심리상담 박사 과정을 밟은 박승균 소방관을 발견하게 됐고, 당시 경기 북부 지역에 소속되어 있어 절차를 밟고 촬영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티빙 제공김 감독은 소방관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하게 된 배경도 밝혔다. 그는 앞서 7년간 장기 실종 아동 가족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증발'을 촬영하며 트라우마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작품 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본인 또한 심리 치료를 받았고, 트라우마를 발견해 치료하게 됐다. 이를 통해 트라우마가 매우 위험한 질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강조했다.
"소방관들과 특별히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트라우마에 대한 여러 논문을 찾아보다가 소방관들의 트라우마를 다룬 논문을 보게 됐죠. 이들을 통해 트라우마의 본질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그는 "기본적으로 소방관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굉장히 강한 분들이다. 직업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소명의식과 사명감에서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건을 겪어도) 단단한 그릇처럼 견디고 견디더라"며 "하지만 트라우마는 (개인이) 약하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고 짚었다.
이어 "소방관들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음에도 이를 드러내기를 원치 않아 하신다"며 "회피하시거나 인지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하시더라"고 안타까워했다.
물론 소방청에서도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소방관들을 지원하기 위한 여러 시스템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소방관들의 트라우마 치료 참여율은 저조한 편이라고 한다.
김 감독은 "저희 다큐멘터리가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게 아니"라며 "제가 기획 단계에 읽었던 논문에서도 (조직 내) 동료 상담과 같은 시스템을 구축해도, 소방관들의 참여율이 낮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어떤 성향들과 분위기가 있다고 지적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때문에 트라우마를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해소하지 못해 도박 등 여러 문제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통계도 있다"며 "트라우마가 트라우마로 딱 끝나는 게 아니라 복잡한 영향을 준다"고 강조했다.
"안전벨트 못하는 소방대원들…면체 문제로 피부 화상처럼 보이기도"
현장 출동하는 과정에서 소방복을 입는 소방관(좌측), 면체를 쓴 소방관의 모습. 티빙 제공작품에선 트라우마 외에도 소방관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김 감독은 작품에서 언급한 신고 접수 후 현장에 출동하는 시간, 이른바 '차고 탈출'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소방대원들 사이에선 얼마나 빨리 현장에 도착하는지에만 맞춰져 있다고 지적한다"며 "사실 출동하다 사고가 발생하면 구조 활동이 불가능해진다. 신속한 구조 활동을 위해서는 안전하게 빨리 가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경북도의회 소속 도의원들이 소방 출동 태세를 점검한다는 명목으로 고의로 논에 불을 지른 사실이 드러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이같은 행태에 당시 소방 공무원 노조는 갑질이라며 반발하기도 했다.
김 감독은 소방차량에 비치된 안전벨트 문제도 지적했다. 그는 "일반 덤프트럭을 개조해서 공작차로 쓰고 버스를 개조해서 지휘차로 사용하다 보니 내부는 모두 쇳덩이로 되어있다"며 "하지만 안전벨트가 3점식으로 되어 있어 공기통을 메고 방화복을 입으면 잠기지 않는다. 4점씩 안전벨트로 교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라이프 라인'. 티빙 제공또한, 미국은 충격을 줄이기 위해 소방관 좌석이 역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한국은 정방향으로 설치된 점도 문제로 꼽았다.
그는 "안전벨트도 제대로 착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충돌 사고가 나면 내부에 부딪치거나 밖으로 튕겨 나가게 된다"며 "실제로 이러한 이유로 순직한 사례도 있다. 안전벨트를 제대로 착용할 수 있었다면 목숨은 잃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기호흡기용 안면부(면체) 제작 업체가 국내에 단 하나뿐인 점도 문제로 언급됐다. 얼굴 크기와 형태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모든 면체가 프리사이즈로 제작되고 있다.
김 감독은 "크기를 스몰, 미디움, 라지로 나누려고 해도 전국 소방관들의 두상을 전수 조사해 평균을 내야 하지만, 비용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면체가 한 사이즈뿐이고 실리콘이 피부에 맞지 않아 트러블이 생기는 소방대원분들이 많아요. 심한 경우 화상 입은 것처럼 피부색이 변하기도 하죠."
김성민 감독은 '라이프 라인' 제작 과정에 대해 "다큐멘터리계에서 전례가 없던 사례"라고 강조했다. 그는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로 데뷔한 감독의 작품을 영화 제작사가 제작하고, 티빙이 투자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는 '라이프 라인'이 거의 최초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종민 기자김 감독은 차기작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이번에는 '믿음'을 주제로 하지만, 종교적인 내용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살면서 아주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더라"며 "그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궁금해졌다"고 웃었다.
김 감독은 끝으로 이번 작품에 대한 바람도 전했다.
"후반 작업할 때도 마찬가지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소방관들의 삶을 왜곡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이 작품을 많은 소방관분들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트라우마는 개인의 나약함 때문에 생기는 마음의 병이 아니니까요."
다큐멘터리 '라이프 라인'은 티빙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