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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리언 브로디의 압도적인 215분…역사가 될 '브루탈리스트'[노컷 리뷰]

애드리언 브로디의 압도적인 215분…역사가 될 '브루탈리스트'[노컷 리뷰]

핵심요약

외화 '브루탈리스트'(감독 브래디 코베)

외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외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
※ 스포일러 주의
 
영화와 영화 속 주인공, 그리고 그 주인공이 설계하고 완성해 나가는 건축물이 완벽하게 공명을 이루며 하나의 이야기로 쌓아 올려진다. '브루탈리스트'는 미국 사회의 그림자와 자본주의의 폭력을 맞닥뜨린 이민자이자 예술가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영화에 대한 영화로 215분의 대서사시를 완성했다.
 
전쟁의 상흔을 뒤로하고 미국에 정착한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는 미국 이민자의 냉혹한 현실 속에 전쟁의 트라우마를 견뎌내던 어느 날, 자신의 천재성을 알아본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가이 피어스)로부터 기념비적인 건축물 설계를 제안받는다.
 
하지만 시대와 공간, 빛의 경계를 넘어 대담하고 혁신적인 그의 건축 설계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후원자 해리슨의 감시와 압박, 주변의 비난이 거세질수록 라즐로는 오히려 더 자신의 설계에 집착한다. 그리고 혁신적인 브루탈리즘 건축에 자신을 투영하던 라즐로는 결국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제81회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 제82회 골든글로브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을 받은 데 이어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화제인 '브루탈리스트'(원제 'The Brutalist', 감독 브래디 코베)는 215분(3시간 35분)이라는 긴 러닝타임과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15분 간의 인터미션(공연 중간 쉬는 시간)으로도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외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외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
'브루탈리스트'는 주인공 라즐로가 설계한 브루탈리즘(Brutalism) 형식의 건축물처럼 단순하고 투박하며 삭막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마치 브루탈리즘 건물 내부를 보는 것처럼 아메리칸드림으로 불리는 미국의 이면, 자본과 예술, 특권층과 이민자, 폭력과 자유 등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이민자이며 동시에 한 예술가가 겪은 30년 삶이 녹아 있다. 그 삶은 마치 재료 그대로의 사용과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브루탈리즘 양식처럼 가감 없이 빛과 그림자를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미국의 상징적인 랜드마크이자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라즐로의 눈에 처음 들어오는 건 자유의 여신상이다. 카메라는 자유의 여신상을 거꾸로, 즉 '세계에 빛을 비추는 횃불을 든 자유의 신상'의 머리와 횃불이 아래로 향하게 비춘다.
 
이 의미심장한 상징은 라즐로라는 이민자가 미국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지 암시한다. 라즐로는 미국에서 자신의 삶도, 예술도 재건하려고 하지만 결국 미완성으로 남은 그의 건축물처럼 녹록지 않다. 파시즘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가 맞닥뜨린 건 자본주의와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이다.
 
살기 위해, 자유를 위해 미국으로 왔지만, 그의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이 인용한 "자신이 자유롭다고 오해하는 사람보다 더 절망적인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은 없다"라는 괴테의 말처럼 그가 누리는 것은 자유가 아닌 '비자유'다.
 
외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외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
해리슨은 라즐로의 천재적인 예술성을 극찬하며 그가 마음껏 자신의 예술혼을 펼치길 바라는 것처럼 후원하지만, 사실상 그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자 한다. 해리슨이 라즐로의 작품에서 본 건 '예술'이 아니라 그의 '명성'과 '오만'이다. 라즐로의 예술성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은 예술의 후광을 입어 자신이 빛나는 것뿐이다.

이처럼 협력과 착취의 경계에서 라즐로는 자신이 원하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부딪히면서도 짓밟힌다. 에르제벳은 그런 라즐로가 쌓아 올린 게 결국 라즐로 스스로를 위한 '제단'이라고 말한다.
 
미국 사회는 라즐로가 '부다페스트 출신 이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말', 즉 '언어'다. 라즐로의 모국어 억양이 섞인 영어를 두고 해리슨은 '구두닦이'라 폄훼한다. 또 에르제벳이나 조카 조피아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미국식'으로 부르는가 하면, 홀로코스트의 공포로 말을 잃은 조피아에게 영어를 가르치라거나 그가 입을 열길 강요한다.
 
미국 사회와 특권층의 이러한 오만함은 건축을 두고 갈등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미국의 특권층은 이민자의 예술성과 노동력으로 명성을 얻지만, 그 천재적인 예술성을 인정하지 않고 통제하고 짓밟는다. 이는 해리슨이 라즐로에게 어떤 폭력을 저지르는지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라즐로의 말처럼 자신의 건축물은 전쟁에서도 살아남았고, 침식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 미국에서 지은 그의 브루탈리즘 양식의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그는 전쟁에서도 살아남았고, 이민자를 향한 폭력도 견뎌냈다. 그와 그의 예술을 짓밟으려 한 해리슨은 사라졌지만, 이를 이겨내고 살아남은 라즐로의 건축물은 미완공임에도 세계 건축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자리 잡게 됐다.
 
외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외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
라즐로의 건축물은 이민자 예술의 상징이자 미국의 오만한 탄압의 상징이다. 자신을 짓밟으려는 미국 사회에서 라즐로는 이민자의 삶과 예술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쌓아 올렸다. 그렇게 전쟁의 비극과 미국의 그림자를 딛고 살아남은 라즐로는 살아남은 예술로서 자신을 증명한다.

그의 예술의 꼭대기를 정오의 태양이 지나갈 때, 건물 내부에 위치한 대리석 위로 십자가가 드리운다. 라즐로가 '자유'라 부른 천장으로 보이는 하늘과 그곳을 통해 비추는 십자가는 죄 많은 이에게는 두려움의 상징이자, 오만한 이에게는 부끄러움의 상징이고, 굴곡진 삶을 살아온 이에게는 고난의 상징일 테다. 그곳에 어떻게 다다를 것인가,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그 자유와 십자가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는 서로 다른 과정을 거쳐 목적지에 선 이들에게 주어진 몫이다.

한 사람의 삶을 건축에 빗댄 '브루탈리스트'는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예산을 이유로 건축물의 구조를 변경하고, 높이를 깎아내리지만, 주인공에게 있어서 이는 단순히 건축 구조 변경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을 제멋대로 재단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브루탈리스'는 라즐로의 삶과 건축을 통해 영화가 어떻게 예술과 자본 사이에서 탄생하는지 보여준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피아니스트' 이후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최고의 연기를 '브루탈리스트'로 다시 썼다. 전쟁의 폭력을 관통한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이민자로서의 좌절, 예술가로서의 고뇌와 한 존재로서의 슬픔이 '브루탈리스트'라는 대서사시 안에서 애드리언 브로디를 통해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외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외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
영화에서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만큼이나 라즐로와 그의 건축물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수단은 '음악'이다. 불협화음처럼 파편화된 듯하면서도 하나로 모이는 음악들은 이민자이자 예술가인 라즐로가 겪은 불안과 고통인 동시에 그의 브루탈리즘 건축물이 예술과 자본 사이에서 상충하며 만들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혼란스럽고 폭력적이면서도 위태롭고 절박한 음악이 '브루탈리스트'의 215분을 가득 채운다.
 
이처럼 대담하고 거대한 프로젝트를 완성한 코벳은 '브루탈리스트' 한 작품만으로도 이미 그가 거장의 반열에 들어섰음을 증명했다. 과연 앞으로 또 어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영화를 만들지, 또 어떤 대담함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만들지 기대하며 기다리게 만든다.
 
영화의 제1막이 끝난 후 주어지는 15분의 인터미션과 스크린에 띄워진 한 장의 사진은 라즐로의 여정과 그가 그토록 바랐던 것들을 한 걸음 떨어져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다. 관객은 인터미션 동안 1막과 2막 사이를 스스로 연결하게 된다.

동시에 주인공의 여정을 함께하며 지친 머리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금 이어질 그의 여정에 더욱더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게 인터미션은 '브루탈리스트'를 완성하는 러닝타임의 일부로써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215분 상영(인터미션 15분 포함), 2월 12일 개봉, 청소년 관람 불가.

외화 '브루탈리스트' 포스터.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외화 '브루탈리스트' 포스터.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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