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 스틸컷. ㈜마인드마크,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스포일러 주의
파시즘이 만든 분열의 초상이란 이런 걸까. 극단적으로 분열된 세계를 바라보는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영화적인 상상력이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됐다. '시빌 워: 분열의 시대'는 폭력적인 권력의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파시즘이 세계를 어떻게 황폐화할 수 있는지 영화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극단적 분열로 역사상 최악의 내전이 벌어진 미국, 연방 정부의 무차별 폭격과 서로를 향한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 속에서 기자 리(커스틴 던스트)와 조엘(와그너 모라), 새미(스티븐 핸더슨) 그리고 제시(케일리 스페니)는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한다. 내 편이 아니라면 바로 적이 되는 숨 막히는 현실, 이들은 전쟁의 순간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마주하게 된다.
'멘' '서던 리치: 소멸의 땅' '엑스 마키나' 등을 선보였던 알렉스 가랜드 감독이 극단적 분열로 나눠진 세상, 역사상 최악의 미국 내전 한복판에서 숨 막히는 전쟁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담아낸 '시빌 워: 분열의 시대'(이하 '시빌 워')를 가지고 돌아왔다.
외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 스틸컷. ㈜마인드마크,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그가 그려낸 '미국 내전'은 영화적인 상상의 산물이지만, 단순한 상상이 아닌 현실에 대한 통찰에 가깝다. '시빌 워'의 소재인 미국 내전이 발아한 시작점에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보이는 극단적인 분열이 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는 실제로 총을 들었거나 총을 들지만 않았지 혐오와 차별,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감독은 이 같은 상황을 보다 영화적인 방식으로 풀어냈고, 그렇기에 영화 속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상상이 아닌 그럴지도 모른다는 현실감으로 다가오게 된다. 특히나 최근 12·3 내란 사태를 겪은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시빌 워'는 영화가 아닌 '현실'에 더 가까우며, 영화가 주는 공포는 보다 피부에 와닿게 된다.
영화는 기자들이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통해 미국 내에서 내전이 발생하며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황폐해지는 모습을 비춘다. 일종의 로드 무비처럼 진행되는 영화의 구성원은 성별과 세대를 아우르는 인물들로 이뤄져 있다.
외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 스틸컷. ㈜마인드마크,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기자들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전쟁의 가장 최전선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아내고자 한다. 리는 제시에게 기자의 일에 관해 "우린 묻지 않고 기록하지. 다른 사람들이 묻도록"이라고 설명한다. 영화는 리의 기자에 대한 정의처럼, 관객들에게 내전의 기록을 통해 직접 질문하고 답을 찾길 원한다.
그리고 특정 인물, 특정 시대, 특정 성향에 한정해 이야기하기보다는 보다 현시대에 분열을 불러온 원인인 '파시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보다 큰 틀 안에서 현실을 바라보고자 한다.
내전 중인 미국에서 한 차례 승리를 거둔 대통령은 이를 두고 '위대한 승리', 더 정확히는 '군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표현한다. 국민을 상대로 한 전투라는 위헌적인 폭력을 두고 '승리'라고 부르는 대통령은 '파시즘'을 상징하는 존재다.
영화는 대통령의 이름이나 정당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그는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우는 3선 독재 대통령으로 나온다. 독재자의 이름은 무솔리니, 카다피, 차우셰스쿠 등 여러 이름을 갖고 나타날 수 있다. 특정 인물을 내세우지 않은 것은 악은 언제 어디서나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알림과 동시에 '파시즘' 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시빌 워' 속 장면들은 어느 나라, 어느 상황에도 대입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장면이 영화 속 폭력적인 학살을 일삼는 군인은 리의 일행이 "우리도 미국인이에요"라고 항변하자 "어느 쪽 미국인?"이라고 반문하는 장면이다.
강권적이면서 독재적이고 비민주적인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에 의해 그들의 반대편 선 이들은 적폐, 반란군, 폭도가 된다. 독재자의 폭력적인 통치 행위에 의해 민주주의와 평화를 염원하는 국민은 광란의 칼춤을 추는 범죄자이자, 처단해야 할 대상이 된다. 실제로 영화 속 "어느 쪽 미국인"이냐고 묻는 이름 모를 군인은 '어느 쪽'이냐를 판단해 총을 겨눈다.
외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 스틸컷. ㈜마인드마크,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치적인 성향이 극단적으로 나뉘는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를 '서부 연합'으로 묶은 것 역시 중요한 설정이다. 국가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데 있어서 '어느 쪽'이냐는 무의미하다. 진보와 보수, 성별과 세대를 떠나 위헌적인 행위, 파시즘에 대항해야 함을 드러낸다.
리의 일행 구성 역시 마찬가지다. 기성세대가 앞서서 나가고, 젊은 세대가 뒤따르며 폭력에 대항한다. 폭력에 대한 투쟁은 '어느 쪽'을 가리지 않고 이어진다. 그렇게 이어진 투쟁은 결국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우리 스스로를 지켜낸다. 앞선 역사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영화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뚜렷하게 이야기하진 않는다. 리의 일행이 워싱턴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건 폭력과 공포, 혐오와 차별, 무너진 일상을 되찾으려는 사람들과 현실을 외면하려는 사람들, 피와 시체로 얼룩진 거리 등 내전의 모습이다. 그리고 총격 속에서도 여전한 일상의 한 조각이다.
리 일행의 여정을 함께하며 목격한 장면들, 그 와중에 떠오르는 공포를 비롯한 여러 감정과 생각, 질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지고 다시 마주하는 현실이 '시빌 워'가 전하고자 한 모든 것이다.
외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 스틸컷. ㈜마인드마크,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이 영화가 블록버스터임을 알려주는 신은 마지막 백악관 전투 장면이다. 실제 내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와 핸드헬드를 이용해 더해진 현장감, 배우들의 열연이 만들어낸 전투 신은 압도적이면서도 공포적이고, 착잡함마저 남긴다.
영화 '리'(Lee)의 주인공이자 종군기자 리 밀러를 연상하게 하는 리 스미스를 연기한 커스틴 던스트와 현존하는 최고의 사진작가이자 영국 출신 종군기자 돈 맥컬린의 이름을 떠오르게 하는 제시 맥컬린을 연기한 케일리 스패니는 정말 내전의 한복판에 선 저널리스트이자 한 인간의 모습을 땅에 발붙인 채 보여줬다. 여기에 와그너 모라와 스티븐 헨더슨의 열연까지 더해지며 '시빌 워: 분열의 시대'가 완성됐다.
영화는 미국보다 한참 늦게 국내 개봉하는데, 12·3 내란 사태 이후 개봉하면서 영화가 보다 가깝게 우리의 현실 안으로 파고들게 됐다. 과연 지금을 살아가는 개개인은 '시빌 워'를 통해 어떤 현실과 미래를 마주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109분 상영, 12월 3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외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 메인 포스터. ㈜마인드마크,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