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지난 14일 독일에서 개막된 뮌헨안보회의(MSC) 기조연설에서 "유럽에서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며 의외의 비판을 쏟아냈다. 향후 트럼프 2기 행정부와 유럽의 동맹국들이 우크라이나 문제를 비롯한 현안에서 대립할 것임이 예고되고 있다. 유럽은 미국의 일방적인 러-우 전쟁 종전 협상에 반발하고 있다. 연합뉴스지난주 유럽은 큰 충격에 빠졌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우크라이나 휴전 협상을 일방적으로 시작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2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한 뒤 종전 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당사국인 우크라이나는 물론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동맹국들과 사전 협의는 없었다.
이후 미국의 우크라이나-러시아 담당 대통령 특사인 키이스 켈로그(Keith Kellogg)는 향후 협상에서도 '유럽은 배제될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휴전 논의에 유럽 국가들은 소외되고 있다.
오히려 피트 헤그세스(Pete Hegseth) 미국 국방 장관은 브뤼셀 나토 본부에서 "우크라이나 영토 수복이라는 목표는 현실성이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이미 러시아가 점령한 20%의 영토를 포기하라고 우크라이나를 압박하는 셈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간절히 원하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NATO)가입도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헤그세스 장관의 이런 발언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유럽 국가들의 요구도 동시에 묵살하는 것이다. 오히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6월에 내놓은 휴전 조건과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은 지난 14일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 우크라이나 방위연락그룹(UDCG)회의 개회사에서 "우크라이나의 국경을 2014년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것은 비현실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런 환상적인 목표를 쫓는 것은 전쟁을 장기화시키고 더 많은 고통을 초래할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헤그세스 장관이 우크라이나 방위연락그룹회의에서 개회사를 하는 모습. 미국 국방부 홈페이지트럼프와 푸틴의 깜짝 전화 통화도 유럽에 좌절감을 안겼다. 두 정상은 1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직접 대화를 했다. 마침 우크라이나 평화 문제를 논의하려던 뮌헨 안보회의 개막 이틀 전날이었다. 트럼프는 유럽의 동맹국들을 제치고 푸틴과 먼저 휴전 논의를 본격 시작한 것이다. 통화 내용이 모두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가 원하는 종전의 조건들이 다뤄졌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동안 유럽의 동맹국들은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승리하게 만들면 안 된다고 주장해왔다. 그럴 경우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인접국인 폴란드와 발틱 3국 등도 연쇄적으로 위험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러시아발 안보 불안이 순식간에 유럽 전체로 확산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당사국인 우크라이나가 느끼는 위협은 훨씬 더 심각하다. 지금 상태로의 휴전은 러시아군에 재건할 시간만 주는 '가짜 평화'가 될 것이라며 걱정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합병했다. 또 동부 돈바스 일부 지역에 있는 친러시아 반군을 지원했다.
그 때도 평화 협정이 있었다. 하지만 푸틴은 8년 뒤인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다. 때문에 러시아군이 언제든 다시 공격해 올 수 있다는 공포가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러시아의 핵 무기 사용 위협에도 불구하고 결사 항전을 하는 것도 이번 기회에 나토 가입을 통해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런 우크라이나의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 미국의 기습적인 종전 협상 개시 선언이 나온 지난 12일에도 독일,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등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는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트럼프 행정부의 휴전 구상에 유럽인들의 절박함은 반영돼 있지 않다. 오히려 미국은 평화 협정이 체결된다고 해도 우크라이나 평화유지군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의 안보에 나토 전체를 끌어들이지 말고 유럽 국가들이 스스로 책임지라는 말이다.
지난 14일 J.D. 밴스 미국 부통령의 뮌헨안보회의 기조연설을 심각하게 듣고 있는 청중들. 이 자리에는 유럽의 군 고위 장성들도 많이 참석했다. 하지만 밴스 부통령은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해서는 간단히 언급하고 유럽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주장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뮌헨안보회의 유튜브 사이트 캡처미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에 매장된 희토류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초강대국 미국이 대규모 자원 개발 투자를 하면,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지켜주는 효과가 있다는 논리다. 미군을 주둔시켜 달러를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면서 우크라이나를 방어해 준다는 트럼프식 발상이다.
조만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리게 될 휴전 회담에는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고위급 관리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다. 유럽의 반발 속에 열리게 될 이번 협상이 결실을 맺을 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분명한 점은 이번 휴전 협상이 우리나라에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의 철수 여부와 그 시점 등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북한군은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이후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 전투에서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달 북한군이 다시 전선에 투입됐다고 말한데 이어, 최근에는 3천 명의 증파를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포탄과 미사일을 비롯한 무기도 러시아에 계속 지원하고 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지난주 트럼프와 푸틴의 통화에서 북러 군사협력에 관해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부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미국 주도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협상이 시작될 경우 북한군의 철수 여부나 시점도 논의될 가능성이 있다. 사진은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힌 북한 군인이 심문을 받는 모습. 지난 달 13일 우크라이나가 공개한 영상에서 이 북한군 포로는 "북한에 가족이 있는가", "조선(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라는 한국말 질문에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X 캡처만약 임박한 미국 주도의 휴전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우리나라에도 기회가 될 수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 회복을 시도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러 관계의 정상화야 말로 북한이 가장 싫어하는 시나리오일 것이다. 우리나라가 러시아를 통해 북한에 대한 지렛대를 만들어볼 여지가 생길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평화 협상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과의 협상에 본격 시동을 걸지도 관심이다. 트럼프가 푸틴의 중재를 활용해 김정은에게 접근한다면 북미 회담의 성사 가능성은 더 높아질 수 있다.
북미 협상이 재개될 경우 김정은은 북한 핵보유의 인정, 주한미군 부분 철수, 한미 연합훈련 축소 또는 중단 등의 요구를 들고 나올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집권 2기의 트럼프가 지난 1,2차 북미 정상회담 때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지금 유럽에서처럼 미국은 우리 국민의 안전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김정은과 합의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탄핵 정국 기간에 이런 협상이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이미 집채 만한 파도가 만들어져 우리의 안방을 향해 오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은 현직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계엄 선포 이후 여전히 국내 문제에 온통 관심이 집중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