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오십 대쯤 보이는 여자가 개의 목줄을 잡고 서서 "이제 가자!"고 사정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개는 벤치에 앉아 꿈쩍 않고 버틴다. 언뜻 보면 '시고르자브종'인데 '로트와일러'와 피가 섞인 듯한 똘똘한 녀석이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물어보았다.
"얘가 왜 이래요?"
"먹을 거 달라고 이래요."
"아! 그렇구나. 이름은요?"
"후추요."
"후추요?"
후추는 향신료다. 떡국이나 만둣국에 살짝 뿌리면 맛이 좋다. 그런 향신료가 개 이름이라니! "먹는 후추요?"
주인이 한차례 웃더니, 음식에 들어가서 맛을 더하는 향신료처럼 항상 곁에 소중하게 있어 달라는 뜻이라고 알려준다. 먹는 것들로 이름을 짓는 주인들이 많단다.
"쪼코, 짜장이, 두부, 호떡, 모찌, 찐빵! 엄청 많아요!"
'후추' 주인이 줄줄 늘어놓는다. 우유, 떡국이, 참이(주인이 소주방을 한단다), 설기(백설기의 줄임말), 빵이, 튀밥이, 쿠기, 라떼, 순대, 만두, 참치, 누룽지……. 과일이나 열매 이름도 많다. 체리, 망고, 보리, 포도, 감자, 완두, 콩이, 열무, 땅콩이……
개들 이름에 왜 이리 먹는 것들이 많을까? 개를 기르는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속설 때문이란다. 먹는 음식과 관련된 이름을 부르면 개가 건강할 뿐더러 장수한다는 것. 그런데 개 이름에 담긴 속설이 나에게는 왜 맞지 않은 걸까?
시 외곽의 마당이 있는 주택에 살 때였다. 그때 친구로부터 데리고 온 강아지 이름을 뭐라 지을까 고민하다가 '살구'라고 부르기로 했다. 초여름이었는데, 마당에 노랗게 익은 살구나무 열매가 보기에도 좋고 시고 달콤한 맛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살구'는 금빛 털을 가진 삽사리였는데 덩치가 크고 부슬부슬한 털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우습기도 하고 듬직하기도 해서 좋았다.
'살구'가 어느 비 오는 날 죽었다. 개집 옆의 낮은 담장에 올라갔다가 빗물에 미끄러지면서 바깥길 쪽으로 떨어졌는데, 다시 올라오지 못했다. 그쪽은 경사가 매우 높았다. 목줄에 매달려 질식사하고 말았다. 비 오는 날 어린 강아지를 실내에 들이지 않고 밖에 묶어둔 탓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살구'가 죽게 된 것이 이름을 잘못 지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슬금슬금 자리 잡았다. '살구'가 순수한 우리말로 열매의 이름이긴 하지만, '죽일 살(殺)'에 '개 구(狗)'가 떠올랐다.
"맨날 '죽을 개'라고 불렀구나!"
그 때문에 한동안 몹시 자책감에 시달렸다. 지금도 '살구'가 생각날 때면 살구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죽일 살, 개 구'가 떠오른다.
그런데 지금 벤치에 앉아 있는 '후추'는 당당할뿐더러 건강하다. '후추'라는 이름대로라면 눈이 따갑거나 알레르기 때문에 맨날 재채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참이'는 소주 때문에 간이 망가져야 하고, '튀밥이'는 어느 날 뻥 하고 터져서 죽어야 하는 건가?
'후추'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버티고 있다. 주인이 "그만 가자!"고 달래면서 목줄을 당겨도 끄덕 않는다. 언제부터 이러는 거냐고 물어보니 주인이 '후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강아지 때부터 자존감을 높여주려고 먹을 걸 줄 때면 소파나 의자 같이 바닥보다 조금 높은 곳에 올려놓았거든요. 그렇게 길들어져서 이제 높은 곳에 올려 주면 당연히 먹을 것을 주는 줄 알아요."
아! 그렇구나. 산책길에 잠시 벤치에 올려놓았더니 먹을 것을 주는 줄 알고 기다리는 것이로구나! 그런데 주인이 간식을 주지 않으니 버티는 거다. '후추'의 표정이 "먹을 걸 줘야지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주인은 '후추'의 자존감을 높여주려고 바닥이 아니라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밥을 준다. 개라고 함부로 대하는 일상과는 격이 다르다. '후추' 역시 제아무리 맛있는 것이 있어도 바닥에서는 먹지 않는다. 비록 개지만 '가오'가 있다. 바닥보다는 조금 위에 올라가서야 먹는다. 그리고 높이 올라가면 밥을 주는 주인을 신뢰한다. 그 믿음 때문에 '후추'는 지금 높은 곳, 벤치에 앉아 버티는 중이다. "약속을 지켜야지요!" 하면서.
헤어진 뒤 문득 '사진 한 장 찍을걸!' 하고 벤치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 보았지만, 그사이 협의가 잘 됐는지 '후추'와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빈 벤치를 보다가 담장 너머로 추락한 강아지 '살구'를 생각한다. 자존감을 모르는 주인 대신…… 빗물을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자신을 위해…… 스스로 높은 곳에 올라갔던 '살구'는 추락했다. 사라진 자기 자리에 반짝이는 빗물을 남겨둔 채.
너의 높이를 몰라서 미안해 '살구'야. 너희들의 높이를 알게 해 준 '후추'야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