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어민이 몸부림치며 북송을 거부하는 모습. 연합뉴스두 가지 이상의 상충되는 가치나 원칙 사이에서 쉽사리 선택할 수 없는 '딜레마'적 상황은 세상에 비일비재합니다. 어떠한 선택을 했다면 그만큼 포기해야 하는 사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의 '생명'이나 '처분'과 연관된다면 더욱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죠. 예를 들어 우리나라 형법 중에선 대표적으로 '사형 제도'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최근 1심 선고가 내려진 '탈북어민 강제 북송' 사건은 그 성격이 그야말로 '딜레마의 끝판'이라고 부를만 합니다. 16명의 동료 선원을 잔혹하게 살해한 탈북어민 2명을 북한으로 다시 돌려보내야 했는지, 대한민국 사회로 맞아 들여야 했는지, 논쟁이 여전히 끊이지 않는 사안입니다.
게다가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문재인 정부 안보라인 인사들이 추진한 북송에 대해 윤석열 정부가 문제를 삼고 이후 검찰 수사가 진행됐습니다. 남북 관계와 탈북민의 지위, 흉악 범죄를 저지른 탈북자에 대한 처벌, 북송의 기준 등까지 여러 쟁점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2019년 11월 이후 1심 선고까지 무려 5년 3개월이 소요됐습니다. 재판부의 판단은 어땠을까요. 오늘의 '법정B컷', 지난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1형사부 재판정으로 가보겠습니다.
사건 발생 5년 3개월 만에 1심…흉악범죄 탈북어민 '북송' 쟁점
문재인 정부 최고위직 공무원이었던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전 국가정보원장,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 등 4명이 긴장된 표정으로 피고인석에 줄지어 앉았습니다. 재판부는 간략하게만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이날 1심 선고는 사건 발생 기준 5년 3개월, 검찰 기소 2년 만에 이뤄졌습니다. 북한 어민 2명이 탄 어선이 동해 북방한계선(NLL) 남쪽에서 우리 해군에 나포된 것은 지난 2019년 11월 2일입니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나포 후 중앙합동조사를 벌였고, 이들이 "동료 선원 16명을 살해하고 도주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조사 사흘 뒤 남북연락사무소를 통해 북측에 어민 2명을 추방한다고 알렸고, 북측은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습니다. 선원 2명은 이튿날인 7일 판문점을 통해 북측으로 추방됐습니다. 나포된 지 닷새 만입니다.
2022년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이 사안을 문제 삼았습니다. 두 달 뒤 국가정보원은 서훈 전 국정원장을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엿새 뒤 북한인권정보센터(NKDB)는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 등 11명을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7개월 정도가 지난 2023년 2월 검찰은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 서훈 전 국정원장,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 등을 국가정보원법상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검찰은 지난 달 14일 결심공판에서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전 국가정보원장에게 징역 5년,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는 징역 4년,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에게는 징역 3년을 각각 구형했습니다.
(왼쪽부터)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 서훈 전 국가정보원장,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 연합뉴스피고인 측은 이날 재판에서 검찰의 공소사실이 불특정 돼 있고 공소권이 남용됐으며, 탈북어민들의 법적 지위는 대한민국 정부의 판단 재량에 달렸다는 등을 근거로 무죄 주장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재판 초반부터 이러한 주장들을 찬찬히 깨뜨리며 배척했습니다.
탈북어민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봐야하는지는 이번 재판의 중요 쟁점이었습니다. 헌법 제3조에 따르면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합니다. 한반도 전체가 대한민국 영토로, 북한은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 탈북민을 한국으로 수용하는 근거였습니다.
검찰 측은 탈북어민들이 대한민국 국민이 맞기 때문에 강제 북송에 근거가 없고, 범죄를 저질렀다면한국에서 수사와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반면 피고인 측은 탈북어민들에 대해선 공공안전을 해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이들로 입국불허가 및 입국 금지 사유에 해당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재판부의 결론은 "대한민국 국민이 맞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강제 북송으로 이들이 대한민국에 살 자유와 권리가 침해됐다는 점, 신속성을 강조해 신중한 법적 검토 없이 북송을 결정한 점에 대해 유죄로 인정했습니다.
▶2025.2.19.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1형사부 1심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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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들이 최고위직 공무원들로서 관계 법령 적법절차 원칙을 준수해 직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지만 북한 주민들이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자백 등만을 토대로 신속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북한 주민들의 북송을 결정하고 이를 집행했다."
"피고인들은 수사와 재판을 통해 범죄자가 저지른 죄만큼의 책임을 지게 만들고 이를 통해 사회안전을 실현하겠다는 근대 형사법과 형사사법 절차를 무용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위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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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재판부는 탈북어민들이 저지른 범죄의 흉악성에 대해선 인정했습니다.
▶2025.2.19.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1형사부 1심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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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의 가혹행위를 이유로 그와 무관한 동료 선원들까지 16명을 순차적으로 불러내 망치 등을 이용해 살해하고 시신을 바다에 버렸다는 것으로 이들의 잔인성은 다언(多言·많은 말)을 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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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어민들은 2019년 10월 중순 함경북도 김책항에서 출발해 북한 해역에서 어로 작업 중이던 어선에서 선장을 비롯한 동료 선원 16명을 망치와 도끼로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유는 선장의 가혹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전해졌습니다. 피고인 측은 이들이 증거물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리고 선박에 페인트칠까지 새로 해서 증거를 완벽하게 인멸했다고 밝혔습니다. 애당초 남한으로 귀순 의사는 없었고 도피하다가 우리 해군에 나포돼 압송된 것이라고도 설명했습니다.
재판부 '징역형 선고유예' 판결 왜
재판부는 이 사건을 다룰 당시 감정적 고려를 완전히 배제하는 게 어려웠을 것이란 점을 참작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고려해 우리 사회로의 무단 진입을 불허한 사건"이라는 피고인 측의 주장을 일부 감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북 분단의 특수성과 분단 상황에서 제도적·법률적 공백이 있어 행정에 한계가 있다는 점도 인정했습니다.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 '수사에 따른 처벌' 보단 '제도 개선을 통한 공백 해소'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시각도 내비쳤습니다.
▶2025.2.19.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1형사부 1심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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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된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돼오면서 법적 논리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모순과 공백이 산재해 이를 피해 가며 적법 행정을 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제도 개선을 마련하는 등 법질서가 처한 모순과 공백을 메우는 대신 수년간 수많은 수사·공소유지 인력을 투입해 징역형의 실형 등을 부과해 불이익을 주는 게 더 나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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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재판부는 사건 발생 3년이나 지난 2022년 정권이 교체된 뒤 검찰이 수사해 기소한 데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정치적 기소'가 아니냐는 겁니다.
▶2025.2.19.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1형사부 1심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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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바뀌고 검찰과 국정원의 지휘부가 교체되면서 국정원 스스로 고발인이 돼 고발한 사건이다. 검사의 객관의무가 준수된 수사와 기소였는지도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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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마친 뒤 인사하는 모습.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22년 6월 21일 출근길 도어스테핑에서 "대한민국 국민인 이 사건 북한 주민들을 북송시킨 것에 문제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이후 7월 6일 국정원은 기관 명의로 직접 고발인이 돼 고발장을 제출하며 사건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전임 정권을 겨냥한 수사이자 기소라는 논쟁이 이어졌는데, 재판부도 이를 감안한 겁니다.
결국 재판부의 결론은 '징역형 선고유예'였습니다.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전 국정원장은 징역형 10개월,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은 징역형 6개월의 선고를 유예받았습니다.
선고유예란 범죄 정황이 경미한 경우 유죄는 인정하지만 일정 기간형의 선고 자체를 미루는 판단입니다. 2년이 지나면 형 선고의 효력을 잃은 것으로 간주(면소)합니다.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자격정지 또는 벌금형에만 가능합니다.
▶2025.2.19.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1형사부 1심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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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들의 형의 선고를 유예함으로써 피고인들의 행위의 위법성은 확인하면서도 피고인들에게 실제상 불이익은 과하지 않게 하는 것이 현 단계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내릴 수 있는 양형 결론이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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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이 보여준 '딜레마'적 상황은 법원의 선고유예 판단으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됩니다. 결정과 절차면에서 잘못은 있지만, 그 사정이 인정되는 부분도 있고, 결국 해결책은 공소유지나 실형이 아닌 사회적 제도 개선에 달렸다는 법원의 시각도 읽힙니다. '정치적 수사와 기소'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일침까지도요.
검찰은 1심 판결에 즉각 항소 방침을 밝혔습니다. 반면 정 전 실장 등은 입장문을 통해 "재판 과정에서 많은 정부 관계자들이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며 "정책적 판단을 이념적 잣대로 접근해 사법적 절차로 재단하려는 잘못된 관행이 더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5년 전 발생한 탈북어민 사건, 다시 반복된다면 정부는, 우리 사회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 또 다시 지난한 논쟁과 정권 교체 뒤 수사, 기소를 반복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