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레버리지 투자의 꽃이자 도박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파생상품을 사랑합니다. 미국선물업협회(FIA)에 따르면, 한국 파생상품시장은 지난 2011년 거래량 기준 전 세계 1위였습니다. 이론적으로 코스피200 선물은 10배, 옵션은 무한대의 레버리지 상품이죠.
그런데 이후 파생시장 거래량 순위는 점차 뒤로 밀렸고, 도입 30주년을 맞은 올해는 10위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한때 전 세계 거래량 1위 파생시장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파생시장의 활력이 떨어진 결정적 계기는 2010년 11월 11일 이른바 '도이치 옵션 쇼크'가 꼽힙니다.
그날은 옵션 만기일이었는데요. 전날 코스피200 풋옵션을 대량 매수한 도이치은행 홍콩지점과 도이치증권 한국법인이 이날 장 마감 10분 전 코스피200 구성종목 중 199개에서 2조 4424억원 규모의 매도 폭탄을 던졌습니다.
코스피는 이 충격으로 3% 가까이 급락했고, 도이치은행 홍콩지점은 437억원, 도이치증권은 12억원을 벌어들였습니다.
이에 따라 금융당국은 수천만원의 기본예탁금(시장 진입장벽) 도입, 사전교육 30시간과 모의거래 50시간 이수 의무화 등 규제를 강화했습니다. 이 같은 규제는 결국 파생시장 위축으로 이어졌다는 게 업계의 공통적인 분석입니다.
해외 레버리지 ETF와 가상자산으로 눈 돌린 한국인
연합뉴스그렇다고 한국인의 레버리지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해외로 눈을 돌렸죠.
예탁결제원이 집계한 올해 해외주식 누적 순매수를 보면, 테슬라 2배 추종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인 'TSLL'이 전체 4위로 7억달러(약 1조원),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 –3배 추종 레버리지 ETF인 'SOXS'가 10위로 3억 5500만달러(약 5300억원)로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보관금액으로는 나스닥 3배 추종 레버리지 ETF인 'TQQQ'가 10위로 38억 3500만달러(약 5조 7천억원),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 3배 추종 레버리지 ETF인 'SOXL'이 14위로 27억 2천만달러(약 4조원) 등 2종목만 10조원에 달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가상자산도 레버리지로 거래하는데요.
한국인의 해외 가상자산 거래소 월간 접속자 수는 343만명으로 국내 거래소 접속자 수(232만명)를 넘어섰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023년 5월 기준 한국인이 바이낸스 전체 거래량의 13%인 583억달러(약 86조 2천억원)를 담당했고, 이런 한국인의 98%는 선물을 거래한다고 분석했습니다. 바이낸스는 100배 레버리지 선물거래도 가능한 거래소입니다.
즉 대규모 투자금이 국내 규제를 피해 해외로 빠져나간 '풍선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금융당국은 이렇게 해외로 나간 한국인의 복귀를 위해 ETF 규제를 풀었습니다. 개별종목 레버리지 ETF 도입을 허용한 것인데요.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2배 추종하는 레버리지 ETF가 이르면 오는 22일 상장됩니다.
금감원 출신 파생상품시장 본부장에 대한 불편한 시선들
연합뉴스ETF 규제 해제와 달리 헤지(Hedge)와 레버리지의 본진인 파생시장에 대한 규제는 도이치 옵션 쇼크 직후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업계 일각에서는 그 이유를 금융감독원 임원 출신 인사가 파생시장을 총괄하는 한국거래소 파생상품시장 본부장(부이사장)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2019년 이후 조효제 전 본부장과 현 이경식 본부장에 이어 차기 본부장으로 내정된 한구 전 금감원 부원장보 등 모두 금감원 부원장보 출신입니다. 특히 금감원 임원 출신은 유관업무가 아니면 재취업이 가능해 오히려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죠.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파생시장에 대한 비전문가이자, 규제와 감독 업무를 하는 금감원 출신이기 때문에 파생시장을 규제와 감독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면서 "개별종목 레버리지 ETF를 도입하는 논리가 자본유출을 막겠다는 것이면, 오히려 파생시장 활성화가 취지에 더 맞는 것 아니냐"고 강조했습니다.
한국거래소 노동조합도 파생상품시장 본부장 자리의 '낙하산' 인사 관행을 중단하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파생상품 수장 자리는 수리통계학과 금융공학에 기반한 높은 이해와 전문성, 자본시장에서의 오랜 실무 경험이 요구되지만, 금감원 고위 임원의 퇴직 후 보상성 지정 좌석처럼 운영되고 있다는 설명인데요.
또 거래소는 파생시장에서 오랜 실무 경험을 가진 전문가가 최고경영자로 선임되는 미국과 유럽 등 주요 국가의 거래소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비전문가 출신으로는 경쟁은 물론 해외 투자자들의 신뢰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게 노조의 주장입니다.
정부는 자본시장 활성화 정책 중 하나로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MSCI도 한국 파생시장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MSCI는 지난해 시장 접근성 평가에서 "주식시장 데이터 사용에 대한 제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파생상품이 제한된다"고 꼬집었습니다. 파생상품에 대한 접근이 선진국 수준으로 개방될 필요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파생시장은 고(高)레버리지 상품들이기 때문에 '건전성'에 초점을 맞춘 활성화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안전과 규제에 익숙한 시각만으로는 한국 자본시장의 숙원인 MSCI 선진국 지수 편입과 수십조원에 달하는 해외 투자금 복귀를 유도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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