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 핵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의 우려가 해소될 때까지 대(對)이란 해상 봉쇄를 유지하겠다고 밝히면서, 중동발 에너지 안보 리스크가 다시 커지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긴장 장기화 전망이 나오면서 원유·가스 의존 구조의 취약성이 다시 부각되자, 재생에너지를 단순한 친환경 에너지원이 아니라 에너지 안보 수단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에너지 안보, 이제는 '연료'보다 '설비·부품' 문제
산업연구원 제공2일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최근 중동 정세 불안은 화석연료 중심 에너지 체계의 취약성을 다시 드러냈다. 산업연은 지난달 28일 보고서에서 자원안보 논의가 더 이상 석유·가스 같은 연료 수입에만 머물지 않고 전력 생산 체계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화석연료 자원안보가 연료를 안정적으로 들여오는 문제라면, 재생에너지 자원안보는 태양광·풍력 설비와 이를 구성하는 소재·부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문제라고 짚었다.
산업연은 재생에너지 쪽이 자원안보 측면에서 더 복잡한 과제를 안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술 변화 속도가 빨라 설비를 미리 쌓아두기 어렵고, 제품 규격도 제각각이어서 비축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여기에 태양광과 풍력 제조 공급망이 특정 국가, 특히 중국에 집중돼 있어 수입선을 일부 다변화하는 수준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근본적인 해법은 국내 산업 기반을 강화하는 데 있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목표와 현실의 간극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기가와트(GW) 보급을 추진하고 있지만, 2024년 말 기준 보급량은 약 41GW에 그친다. 산업연은 보급 목표는 빠르게 확대되는 반면 국내 제조 기반은 이를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풍력의 경우 2024년 말 기준 국산 터빈 비중은 47.5%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앞으로 해상풍력이 본격 확대되는 과정에서 국내 공급 능력이 수요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면 수입 설비 의존도는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진단이다.
태양광은 제도, 풍력은 병목…서로 다른 해법
태양광 모듈. 연합뉴스산업연은 태양광과 풍력의 정책 처방이 달라야 한다고 제안했다.
우선 태양광은 신재생에너지공급의무화제도(RPS)와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현물시장 중심 구조가 값싼 수입재 선택을 유도해 국내 제조 생태계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봤다.
즉, 가격 경쟁 중심 구조가 수입산에 유리하게 작용하면서 국내 제조업 기반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정부 입찰과 장기계약 중심으로 제도를 전환하고, 공공이 주도하는 별도 트랙 도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가격만을 기준으로 수입 제품에 쏠리는 구조를 완화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반면 풍력은 가격보다 인허가와 인프라 등 '병목' 문제가 더 크다고 진단했다. 인허가 지연, 군 작전성 평가 소요 기간, 전용 항만과 송배전망 인프라 부족 등이 사업 지연의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군 작전성 평가는 풍력발전기 설치가 군 레이더나 항공 작전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는 절차다.
산업연은 풍력 확대를 위해서는 전용 항만 확보, 계통 인프라 확충, 군 작전성 평가 관련 규제 개선 등 비가격 요인을 우선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국산 기자재 사용을 무조건 확대하기보다는 핵심 품목을 중심으로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 더 현실적이라고 봤다. 무리한 확대는 사업비와 발전단가 상승으로 이어져 오히려 보급 속도를 늦출 수 있기 때문이다.
전력망·첨단산업 수요까지…에너지 안보의 확장
전문가들은 에너지 안보를 논의할 때 기후위기 대응과 함께 전력망 문제까지 포함해 종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훈 고려대 오정 리질리언스 연구원 연구교수는 정부의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초안에 대해 "전기를 '얼마나 많이' 생산할지에만 집중한 나머지 핵심 과제를 간과했다"며 △전력이 흐르는 '길(전력망)'의 병목 문제와 △반도체 공장처럼 순간적인 정전조차 허용하지 않는 첨단산업의 고신뢰도 수요 문제를 짚었다.
이어 "발전량을 단순히 더하는 산수를 넘어,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스마트 전력망 설계로 계획이 진화해야 한다"며 "그래야 기후위기 대응과 첨단산업 경쟁력 확보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중동발 에너지 리스크를 계기로 재생에너지 확대 역시 설비·부품 공급망과 국내 제조 기반, 전력망 병목, 첨단산업 전력 수요까지 아우르는 종합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릴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