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궁궐 건축의 자연적 조형미를 보여주는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을 뿐 아니라 가장 오랜 기간 조선의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세계인의 유산인 '최고의 궁궐' 창덕궁. 그러나 그 돌담은 현존하는 궁궐 돌담 중 '최악의 돌담'으로 꼽히고 있다.
돌담 훼손의 모든 가능 사례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있는 곳, 그래서 우리나라 궁궐 중 유일하게 돌담길을 따라 걷는 일이 불가능한 곳, 그곳이 바로 창덕궁이다. 개선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사진을 보자. 먼저, 창덕궁 안 개인집.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궁궐 담 안에 2층 개인주택이 들어서있다. 궁궐을 정원 삼고 궁궐 돌담을 담벼락 삼은 이 개인주택은 1960년대 창덕궁 관리소장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이후 문화공보부 간부가 사유지로 사들여 개인 주택이 된 건물이다. 지금 소유자는 1980년대초 이 집을 매입해 거주하고 있다.
창덕궁 돌담의 일부는 아예 이 개인주택의 철문으로 개조된 상황이다. 창덕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1997년. 그 후로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버젓이 방치돼 온 것일까? 담당부서인 문화재청 창덕궁 관리사무소측은 "민가 매입을 위해 노력 중이지만 순탄치 않다"는 말만 십수년째 되풀이 중이다.
다음으로, 돌담 개인집.
창덕궁 돌담을 따라 쭉 걸어 올라가면 개인주택들이 창덕궁 돌담을 개인주택들이 담벼락과 축대 삼아 줄지어 있다. 많은 경우 창덕궁 돌담과 인접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붙어있다. 창덕궁의 서북문인 '요금문' 옆 민가는 아예 시멘트를 발라서 돌담과 궁궐문 영역을 사유화했다.
사유지와 개인집만의 문제일까? 다음 사진을 보자. 창덕궁 돌담에 붙은 '원서노인정'.
이것은 개인주택이 아니라 동네 주민을 위한 노인정이다. 가회동주민자치위원회의 현수막이 걸려 있는 공용 건물이다.
이 건물마저도 창덕궁 돌담에 벽을 덧대서 창고와 같은 공간으로 삼고 있다. 집들마다 다 그렇게 돌담을 막고 덧대며 사용 중이니 우리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냐는 식이다.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훼손에 대한 무감각이 민관의 총체적인 문제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다면, 개인 주택이나 공용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창덕궁 돌담은 어떤 상태일까? 마지막 사진에서 보듯 '주차장'으로 사용 중이다.
북촌 원서동의 주차난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유일한 대안일까.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세계인의 유산인 창덕궁 돌담길을 보행자와 관광객으로부터 빼앗아 주민의 주차장으로 삼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시급히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자동차의 매연으로 인한 돌담의 손상을 막기 위해 그나마 전면주차를 의무하는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는 당국에게 더 근본적인 대안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까.
우리가 과거 약탈당했던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할 때 프랑스는 이렇게 응수했다. "너희가 가져가서 어떻게 관리하려구. 이 문화재들은 너희보다 우리가 더 잘 보존할 수 있어"라고.
솔직하게 자문해본다. 우리는 과연 '세계인의 유산'을 관리할 준비가 돼 있는가? 우리나라 어느 궁궐, 나아가 세계 어느 궁의 담도 이런 식으로 보존 관리되는 법은 없다. 하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 돌담인 바에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