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장교가 강제추행치상죄로 기소된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운전병을 강제추행해 정신적 상처(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입힌 죄('군인 등 강제추행 치상죄')로 기소된 해병대사령부 소속 오 모 대령에 대해 원심 판결 중 유죄부분을 파기하고, 이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도록 원심법원에 환송한다고 지난달 26일 판결했다.
이 사건은 1심에서 피고인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고, 2심에서 징역 1년 9개월이 선고되었다.
파기환송 재판은 고등군사법원에서 10월 하순에 열릴 예정이다.
피해자가 진술한 이 사건 개요는 이렇다. 2010년 7월 9일 자정무렵을 전후해 운전병 이 모(22)씨가 오 모 대령을 태우고 가던 50분 남짓 사이에, 술에 취한 오 대령이 수시로 차를 세워 4차례에 걸쳐 운전병을 강제로 성추행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원심도 공소사실에 포함된 3회의 강제추행 중 1회째와 2회째의 강제추행은
무죄로 판단하고, 3회째의 강제추행만을 유죄로 인정하였는데, 그 이유가 피해자의 진술이 객관적 사실이나 경험칙 등에 비추어 믿기 어려움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충분히 수긍할만만 내용임에도 3회째의 강제추행만을 인정하였다"며 "1, 2회째 강제추행을 무죄로 판단한 근거(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없음)가 3회째 강제추행에도 적용돼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진술한 사건경위서의 내용에 '3회에 걸쳐 추행을 당하는 과정에서의 쌍방의 대화와 행위'를 시간대별로 상세하고 생생하게 진술하고 있는데, 피해자가 피고인을 태우고 간 50분 남짓한 시간 중 순수하게 운행하는 시간 35분을 제외한 15분 안팎의 짧은 시간 동안에 각기 다른 장소에 차를 세운 상태에서 그 내용이 모두 일어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피해자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는 취지의 상해진단서가 증거로 제출되었으나 이 진단서는 피고인으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했다는 피해자 진술이 사실임을 전제로 한 것에 불과하므로 그 내용만으로 피해자가 피고인으보터 강제추행을 당했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사진=이미지비트 제공)
#1 누구의 말에 더 신빙성을 둘 것인가 : 피고인, 인권위 조사에서 피해자 주장 일부 시인이 사건에서 피해자와 피고인의 진술 중 누구 말에 더 신빙성을 둘 것인가가 관건이다.
1~3회째 강제 추행까지는 당사자 쌍방의 진술, 차량 운행기록, 차량 목격자 등 관련자 증언 등을 통해 기소 내용에 포함됐고, 마지막 4회째는 시간 등 객관적 사정과 부합한다고 볼 수 없어 기소 대상에서 제외됐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점을 이번 판결의 핵심 이유로 들고 있다. 반면 피고인의 진술에는 신빙성을 부여하고 있다.
재판부는 "사건의 진상파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국가인권위원회 소속 조사관들이 부대를 전격적으로 방문해 조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피고인은 형사소송법상 보장된 진술거부권이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만취한 상황에서 피해자의 주장과 일부 일치하는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식의 진술을 했다.(당시 작성된 피고인의 진술이 기재된 서류들은 이 사건 공판과정에서 모두 증거 능력이 부정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피고인이 무고함에도 자포자기의 위축된 심리상태에서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다고 못 볼 바 아니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이 사건 조사를 담당했던 국가인권위원회 정상영 팀장은 "인권위 조사는 형사소추, 즉 기소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권침해 여부를 조사하는 임의적 조사이기 때문에 진술거부권이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사전에 고지할 의무가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 법률 대리인 이경환 변호사는 "가해자가 인권위 조사과정에서 자백에 가까운
진술을 했다. 그런데 대법원 재판부가 임의적 조사기관인 국가인권위에 해당 사항이 없는, '형사소송법상 피고인 방어권 고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증거능력을 배제했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이어 "이 사건은 피해자 진술밖에 없고, 피해자가 정신적 후유증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 점을 감안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판단해야 하는데, 재판부가 그 부분을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2 누구의 말에 더 신빙성을 둘 것인가 : 피해자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피해자는 사건 발생(2010년 7월 9일 자정무렵) 이후 열흘만에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22일 간의 피해자 진료기록을 살펴 보면, 그는 정서 불안 증세가 심각했다.
"저한테 아무 것도 물어보지 마세요.아무 것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7월 20일)
"부대 상관에거 성폭행(강제추행)을 당하고 나서 말도 거의 하지 않고 혼자 멍하게만 있어요."(7월 20일 피해자 어머니가 말한 아들이 입원하기 10일 전, 사건 직후 피해자의 상태)
"같은 병실에 다른 군인 때문에 불안해 죽겠어요. 저 아이가 군에서 심어놓은 애고 언제 저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해요"(7월 26일)
"여자 간호사가 터치를 하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나 남자 간호사가 약을 주기 위해 손이 닿거나 하면 깜짝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임"(7월 27일 담당 의사)
7월 29일 담당 의료진의 소견이다. "병원을 찾게 된 사건으로 인해 자기통제에 어려움이 생기고 성적 수치심 및 남성성의 손상 등 내적 상태가 심한 상태이다. 정서적으로는 불안과 무력감이 심하고 주변을 쉽게 위협적이고 피해의식적으로 지각하여 저항적이고 냉소적인 대처를 하는 등 적응에 어려움이 있는 상태이다. 약자라는 사실에 예민해져 있고 사건의 처리과정에 있어서 상처로 힘들어지면 자해행동을 할 가능성도 우려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시사된다."
7월 31일 경과기록이다. "그 사건과 관련된 꿈을 꿔요. 이제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그냥 사람들도 안 만나고 가족들하고만 살거예요. 저는 결혼도 못할 거예요."
대법원 재판부의 판단은 '피해자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음'을 이유로 피해자가 강제추행을 당했다고 신뢰할 수 없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 역시 '피해자의 진술이 사실임을 전제로 한 것에 불과'하므로 강제추행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가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려면, 피해자가 왜 사건 발생 직후에 그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는지, 그게 아니라면 강제추행이 아닌 다른 요인이 있었는지가 설명이 되어야 한다.
또, 대법원 재판부는 "피고인이 무고함에도 자포자기의 위축된 심리상태에서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다고 못 볼 바 아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형평성의 취지에서 볼 때, 피고인의 정서 못지 않게 피해자의 정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피해자가 사건 직후부터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극도의 정서적 불안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일관된 진술을 해내기란 어렵다는 점이 감안되어야 한다.
그리고 재판부는 50분 남짓한 시간에 23쪽에 이르는, 이 사건의 경위서에 적시된 강제추행이 모두 발생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지만 인간이 충격을 강하게 받으면 그 때 받았던 인상이 평소보다 훨씬 강력해질 수 있다. 죽음의 순간에 삶의 모든 단면이 떠오르듯이.
재판부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피고인과 피해자가 각기 처한 상황은 크게 차이가 난다. 피고인은 위계질서가 강한 군대의 상사이자, 판결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소속된 조직의 '명예'가 갈리는 그 조직의 장교이다.
반면 피해자는 상사에게 거역했을 때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군대 조직의 힘없는 병사이고, 살해 위협의 공포를 느낄 정도로 자신이 겪은 어떤 사건으로 인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는 재판 진행과정에서 피고인으로부터 합의금으로 1억원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올 9월 대학 1학년 2학기에 복학했지만 1주일 만에 자퇴했다. 군 인권센터를 찾은 그는 사건이 일단락 되어야만 안정을 찾을 수 있겠다고 토로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