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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일반

    그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화평법과 화관법 제2라운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화평법'과 '화관법'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산업계의 끈질긴 반발에 박근혜 대통령은 두 법을 '악법'으로 규정했다. 새누리당과 환경부는 기업 입장을 대폭 수용한 화평법 시행령을 마련하고 있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국민의 안전을 무시한 처사"라며 반발하고 있지만 메아리가 약하다.

    '화학물질의 등록과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유해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이 시행령 개정을 앞두고 다시 뜨거운 감자가 됐다. 두 법은 국내에 수입·유통되는 화학물질의 관리체계를 개선해 국민의 안전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마련된 것이다.

    화평법은 신규 화학물질을 연간 1t 이상 제조·수입·판매할 경우 정부에 보고·등록하고, 취급 화학물질 정보를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화관법은 유해물질 누출사고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면 매출액의 5%를 과징금으로 부과하고, 형사상 처벌을 강화했다. 두 법은 2015년 1월 1일자로 시행될 예정이고, 시행령 개정만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시행령 개정과 함께 두 법이 무용지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와 청와대, 여당까지 두 법에 반발하는 산업계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어서다.

    화평법과 화관법 통과 이후 산업계는 "화평법은 투자 걸림돌", "화평법과 화관법은 과잉규제 입법", "화평법과 화관법으로 기업 생산활동에 차질"이라는 주장을 거듭해왔다. 그러자 청와대와 환경부, 집권여당인 새누리당까지 재계의 입장을 반영하겠다고 나섰다.

    환경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윤성규 환경부장관이 가장 먼저 나섰다. 윤성규 장관은 9월 16일 언론사 산업부장단 간담회에서 "시행령에서 연구개발(R&D)용 화학물질 등록을 면제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당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다.

    새누리당은 최근 환경부와 함께 당정협의를 통해 R&D용 화학물질 등록 면제, 0.1t 이하의 소량 신규화학물질 등록 간소화, 영업비밀 보호를 위한 조치 반영, 반복적·고의적인 화학사고에 대해서만 최대 과징금 부과 등을 담은 시행령 개정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산업계도 '버티기'에 들어간 모양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최근 화학물질 유통량 조사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기업체 1만6547곳 중 화학물질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기업이 1만4225곳에 달했다. 2007년 개정된 화관법이 '유해화학물질 관련 정보를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음에도 업계의 86%(대기업은 92.5%·중소기업은 85.7%)가 이를 어기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화학물질 정보를 비공개로 요청한 기업이나 사업장이 학교·아파트에 매우 근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반 국민이 화학사고의 위험에 상당히 노출돼 있다는 얘기다.

    (사진=더 스쿠프 제공)

     

    심상정 의원은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동시에 'OECD 화학사고 예방지침서'를 따라야 했다.

    이 지침서는 '지역사회의 위험설비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을 주민이 인지하고 정확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화학물질 정보를 공개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기업경쟁력 강화라는 이유로 16년째 이 지침서는 법제화되지 않았고, 그 결과 주요 국가산업단지에서는 크고 작은 화학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 화평법·화관법은 악법인가

    산업계의 유해화학물질 정보 비공개로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거다. 화평법과 화관법의 핵심 내용이 유해화학물질 관련 정보공개다. 하지만 산업계는 영업비밀 등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있다.

    화평법과 화관법을 둘러싸고 '기업 이익이 먼저냐', '국민의 안전이 우선이냐'는 논란이 벌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다만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 사건 이후 두 법이 개정된 점에 비춰보면 국민의 안전이 먼저라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은 가습기 살균제에 의해 400여명(127명 사망)의 폐질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은수미 민주당 의원은 "산업계는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을 벌써 잊은 것이냐"며 "사람보다 기업 이익이 우선인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국회가 만든 법률을 환경부가 시행령을 통해 면제조항을 만들겠다는 윤성규 장관의 발언은 헌법기관인 국회를 무시하는 것"이라며 "주관부처가 법 시행과 제도 안착에 힘을 쏟지 않고, 기업의 눈치를 보며 법 취지와 위배되는 시행령을 만든다는 건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심상정 의원은 10월 14일 시작되는 국정감사 때 화평법과 화관법의 당위성을 제대로 따져보겠다는 심산이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등을 증인으로 신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 의원은 "화평법보다 기준이 높은 REACH(유럽연합의 신규화학물질관리규정)는 잘 지키면서 유독 화평법만 문제 삼는 산업계의 화학물질 관리 실태를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심 의원은 "이번 국감을 통해 정부가 화학물질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의지가 있는지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더 스쿠프 제공)

     

    REACH의 위해성 평가 등록 항목은 화평법보다 많고, 비용도 많이 들어 화평법보다 훨씬 강력한 유해화학물질 관리 규정이다. 그럼에도 산업계의 입장은 요지부동이다. 어떻게든 화평법의 기준을 유럽 REACH보다 낮은 수준으로 만들어놓겠다는 거다.

    화학업계의 한 관계자는 "산업계의 주장은 화평법대로 하면 실험용도로 쓰이는 소량의 신규화학물질까지 등록해야 하는데, 비용이나 시간을 고려해 일부 예외규정을 두거나 등록 절차를 간소화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진=더 스쿠프 제공)

     

    ◈ 산업계, 당정청 믿고 버티기

    다행히 양측 간 합의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심상정 의원은 "R&D라는 명목으로 화학물질을 들여다 놓고 실험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엄격한 규정이 있다면 (산업계에서 요구하는) 면제조항을 둘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심 의원은 "하지만 연구실 밖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은 R&D용이 아니라는 걸 명확히 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노동자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제안을 산업계가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당정협의체를 구성한 환경부와 새누리당이 산업계에 유리한 시행령 개정안을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심상정 의원이 국정감사 증인으로 요청한 기업인들은 참석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며 "당정과 이야기가 잘 되고 있는데 굳이 증인으로 참석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라고 꼬집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9월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3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비유를 쓰며 "화평법과 화관법이 기업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유념해 달라"고 주문했다. 정부와 산업계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으면 좋은 법도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박 대통령의 말처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담지 않은 법도 '악마'로 돌변할 수 있다. 지금 화평법·화관법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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