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반구 하늘에 떠 온세상을 은은히 밝히던 큰 별이 끝내 스러졌다.
5일(현지시간) 95세를 일기로 타계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인권 투사에서 용서와 화해의 정치인으로 거듭난 `우리 시대 최고의 위인'(고든 브라운 전 영국총리)이었다.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그는 27년동안 정치범으로서 옥고를 치르는 등 백인정권의 강고한 아파르트헤이트(흑백차별) 정책에 맞서 현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이끌며 투쟁했다.
그러나 그의 위대성은 민주적 선거를 통해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더욱 빛났다. 흑인을 탄압하던 백인을 용서와 화합 정신으로 포용해 무지개처럼 서로 다른 인종이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오늘의 남아공을 건설한 것.
탄압을 받던 피지배 계층이 권력을 장악한 뒤 압제자들을 대거 숙청하지 않고 평화공존을 도모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다.
그는 또 권력욕을 버리고 대통령 자리를 물러난 뒤에도 인류 평화를 위한 외길에 매진함으로써 남아공은 물론 세계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자'의 길을 걸어왔다.
◇ 출생과 성장 = `롤리흘라흘라 만델라'. 1918년 7월18일 남아공 동남부 트란스케이의 시골마을 음베조에서 템부족 추장 가문 후손으로 태어난 만델라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의 아버지가 붙여준 롤리흘라흘라는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는 뜻으로, `말썽꾸러기'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만델라는 후에 기독교 계통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은사로부터 `넬슨'이라는 서양식 이름을 얻게 된다.
남아공의 제2대 부족인 코사족에 속하는 템부 부족의 마디바 가문 출생인 그는 음베조 마을의 족장이던 아버지 헨리 음가들라 만델라가 9세때인 1927년 사망하자 템부족 왕을 후견인으로 해서 교육을 받게 된다.
나중에 남아공 국민은 만델라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가문 이름을 따 '마디바'로 부르곤 했다.
만델라는 템부족 왕실이 있는 음케케즈웨니로 옮겨 당시 흑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초등학교와 중·고교를 졸업하고 포트헤어 대학에 진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얻어 홀로 된 어머니에게 기쁨을 안겨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만델라는 그러나 대학에서 정학처분을 당하며 인생 행로가 바뀌었다.
6명으로 구성된 학생회의 대표로 선출된 그는 학생회가 대학 당국의 정책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거수기 노릇에 머물수 없다며 학교 측의 뜻을 거스르고 학생회 대표를 사임한 것.
음케케즈웨니로 돌아온 만델라는 템부족 왕이 미리 정해둔 여인과 결혼시키려 하자 이를 피해 무작정 요하네스버그로 상경했다.
◇ 투사가 되다 = 법률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방송통신대학인 남아공대학(UNISA) 학사 과정을 이수했다.
이 과정에서 만델라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등 흑인지식층과 교분을 트면서 백인정권의 흑인 차별정책에 눈을 떠 민주화투쟁을 시작했다. 25세때인 1943년 당시 민주화 투쟁의 중심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담했고 이듬해인 1944년에는 ANC 청년조직인 'ANC청년동맹'(ANCYL)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34세때인 1952년에는 변호사 자격을 획득해 또다른 민주화 운동 지도자 고 올리버 탐보와 함께 남아공 최초의 흑인 법률사무소를 설립했다.
만델라가 ANC의 중심인물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한 것은 1952년의 전국적 저항운동이었다. 그는 당국의 차별적 조치에 맞서 전 국민이 궐기하는 불복종 운동의 동조자를 규합하는 책임을 맡아 전국을 돌며 치밀하게 지지자를 확보, 수 개월에 걸친 저항운동을 벌였으며 처음으로 당국에 체포됐다.
이 저항운동으로 ANC는 소규모 결사조직에서 전국적으로 10만명의 회원을 지닌 강력한 조직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러나 백인정권의 탄압정책은 더욱 강경해져 1960년 3월 요하네스버그 인근 샤퍼빌에서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69명이 사망하는 '샤퍼빌 대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백인정권은 같은해 4월엔 반(反)공산당법을 발표, ANC를 불법조직으로 규정했다.
이후 만델라는 더 이상 비폭력 저항운동으로선 민주화를 이룰 수 없다며 ANC 지도부에 무장저항운동을 펼 것을 강력히 주장, 1961년 지하 무장조직인 "움콘토 위 시즈웨(민족의 창)'의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 "'검은 뚜껑별꽃'을 잡아라" = 이후 당국의 감시를 피해 1962년 출국,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수개월 간 체류한 뒤 비밀리에 남아공에 귀국했으나 같은해 8월 그를 추적해온 경찰에 체포됐다.
이에 앞서 만델라는 노동자, 운전기사 등으로 변장하며 백인정권의 감시망을 용케 피해다녀 경찰이 그에게 '검은 뚜껑별꽃'이란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1964년 '리보니아 재판'에서 내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그가 법정에서 행한 최후진술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운동의 상징적인 연설이기도 하다.
그는 "난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와도 맞서 일생동안 투쟁해왔다. 모든 사람이 함께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누리며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을 품고 있다. 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으며 이를 성취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이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백인 재판부가 사형을 선고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고 훗날 자서전에서 술회한 바 있다.
만델라는 1964년 케이프타운 앞바다에 위치한 로벤섬의 악명높은 교도소에서 환갑을 지내는 등 18년의 옥고를 치렀다. 죄수번호 46664였다. 64년에 로벤섬에 수감된 466번째 죄수라는 뜻이다. 그는 1982년 케이프타운에 소재한 폴스무어교도소로 이송됐다가 1988년 웨스턴케이프주 팔에 있는 빅터 퍼스터 교도소로 옮겨져 1990년 2월 출감했다. 모두 27년간의 긴 옥살이였다.
백인 정권은 노조의 파업 투쟁 등 국내적 저항과 국제사회의 제재 등 압력에 더 이상 흑인탄압정책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마지막 백인 대통령인 F.W.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만델라를 석방하는 한편 ANC도 합법조직으로 인정했다.
이후 백인정권과 만델라가 이끄는 ANC 등 흑인 정당·단체 등이 협상에 나서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민주화 시대에 대한 청사진을 그렸다. 이를 통해 1994년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고 시장경제의 틀을 유지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만델라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시기가 바로 이 때로 1993년이었다. 그는 클레르크와 함께 공동으로 상을 받았다.
◇ 용서와 화합으로 무지개 국가 건설 = 만델라는 1991년 ANC 총재로 취임했다. 1994년 4월 27일 흑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첫 민주적 선거에서 ANC가 다수당으로 승리했다. 이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헌법의 간선제 규정에 따라 국회는 다음달인 5월에 만델라를 이 나라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의 나이 76세 때였다.
만델라는 취임 연설에서 "자유를 향한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따로 떨어져 행동할 경우 성공할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단합된 국민으로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화해와 국가 건설을 위해 함께 행동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평화를 누리도록 하자. 모든 사람이 일자리와 빵, 물 그리고 소금을 갖도록 하자. 다시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 압제와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대통령 재임 기간 만델라는 백인사회에 대한 보복을 취하지 않고 역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먼드 투투 주교를 위원장으로 '진실화해위원회(TRC)'를 출범시켜 피를 흘리지 않고 과거사를 정리했다.
백인정권 당시 경찰, 군 등 안보 기관에 근무하면서 흑인에 대한 테러와 인권탄압을 자행한 가해자가 TRC에 출두해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할 경우 사면하는 대화합조치를 취했다.
이를 통해 남아공은 극심한 흑백 갈등을 겪지 않고 안정과 평화공존의 걸을 걸었다. 이를 통해 남아공 경제가 다시 성장의 길로 전환했다. 흑인과 백인이 피부 색깔이 다르지만 무지개처럼 조화를 이루는 나라를 지향하게 된 것.
◇ '정신적 대통령' = 만델라는 1999년 5년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직에서 퇴임했다. 헌법 규정상 재임이 가능했지만 단임으로 끝냈다.
그는 퇴임 이후 어린이재단, 만델라재단 등을 통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및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퇴치 활동과 어린이 교육을 위해 기금마련과 자선활동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는 등 사회에 대한 공헌활동을 지속했다.
지난 2001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기도 했던 그는 그러나 고령으로 점차 쇠약해지면서 2004년 모든 공식 활동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남아공의 정신적 대통령이자 '살아있는 성인'으로 존경받아왔다.
남아공이 2010년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을 개최할 당시 한 장면은 남아공 국민의 만델라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당시 남아공에서는 월드컵을 유치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그가 과연 월드컵 기간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미 92세의 고령인 그는 당시 폐막식에 부인 그라사 마셸 여사와 함께 골프카트를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그라운드를 가로 질러 퇴장하기까지 수만명의 사람들이 '마디바'를 연호하고 부부젤라를 부르면서 그에 대한 극진한 애정과 존경심을 표시했다.
그후 약 1년이 지난 2011년 5월 17일. 제이콥 주마 대통령이 만델라 자택을 찾아 1시간 가량 오찬을 함께 했다.
주마 대통령의 만델라 방문은 지방선거를 하루 앞두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도가 담긴 행위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당시 제1 야당 민주동맹(DA)의 백인 여성 당수인 헬렌 질레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DA가 만델라의 화합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당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주마 대통령이 직접 만델라를 만남으로써 ANC야말로 만델라의 정신을 계승하는 정당이라는 점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라는 해석이다.
현직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델라 전 대통령에게 기대는 형국인 것.
만델라는 월드컵 이후에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 2011년 1월에는 호흡기 질환 증세를 보여 요하네스버그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가 이틀만에 퇴원했다.
남아공 정부는 이후 군의관이 이끄는 팀을 보내 만델라와 함께 기거하면서 그를 24시간 돌보도록 했다. 만델라의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국민이 거의 공황 상태에 빠지자 그의 건강을 정부가 더욱 세심히 살피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워낙 고령인 만델라는 호흡기 질환 증세로 병원을 찾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그는 27년의 옥살이 기간 약 13년을 채석장에서 노역했다. 이 때문에 폐결핵을 앓기도 했다.
그는 2012년 12월 폐 감염증 치료를 받느라 성탄절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고 이듬해인 2013년 3월과 6월에도 폐렴이 재발해 입원 치료를 받았다.
◇ '우리 시대 최고 위인' = 만델라는 국제사회에서도 매우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이 때문에 남아공을 방문하는 유명 인사는 꼭 만델라를 만나고 싶어했다. 수도 프리토리아에서 900㎞ 떨어진 쿠누로 날아가는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