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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반도는 왜 우크라이나 대신 러시아를 선택했나?



유럽/러시아

    크림반도는 왜 우크라이나 대신 러시아를 선택했나?

    [임기상의 역사산책 ②]나찌 독일의 침공 앞에서 등 돌린 우크라이나와 크림

    우크라이나 대평원에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들. 이 평원에서 독일군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가 군대와 소련군이 격전을 벌였다.(출처=영화 '해바라기의 한 장면)

     

    ▣우크라이나 들판에 쓰러진 이탈리아 병사와 그의 아내 이야기


    중학교 때쯤 단체로 본 영화였나?

    광활한 우크라이나 평원에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들 사이로 울면서 뛰어가는 이탈리아 여배우 소피아 로렌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과의 전쟁에 이탈리아 병사인 남편 안토니오는 참전한다.

    전쟁 막바지에 아내 지오반나는 남편이 전사했다는 통지서를 받는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어느 제대군인이 남편이 눈속을 헤치고 도망가는 모습을 봤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녀는 남편을 찾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떠난다.

    거기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죽은줄 알았던 남편이 어린 우크라이나 여인과 자식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해바라기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평원을 울면서 달려간다.

    그러면 왜 나찌 독일과 소련과의 전쟁에 이탈리아 병사들이 참전한 걸까?

    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독일 육군 350만명이 소련의 국경 너머로 쏟아져 들어가 소련군을 궤멸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에 동맹국가인 이탈리아의 1개 군단을 비롯해 루마니아,핀란드,헝가리군 등도 가세했다.

    당시 유럽을 석권한 나찌 독일의 잇따른 승리에 조바심을 느낀 이탙리아 독재자 뭇솔리니는 군대 파견을 대가로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그의 간청을 못 이긴 히틀러는 약체 이탈리아군을 이 전쟁의 악세사리로 끼워주었다.

    전쟁 초반 연전연승하던 나찌는 1943년 겨울 스탈린그라드에서 25만명이 죽거나 생포되는 대참사를 겪는다.

    이후 혹한 속에서 죽음의 후퇴길에 나선 남편 안토니오는 우크라이나 농민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다.

    ▣독일군을 해방자로 맞은 우크라이나 국민들


    소련의 남쪽지방을 치고 우크라이나로 들어간 독일 남부집단군 병사들은 의외의 광경을 보고 놀란다.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꽃을 던지며 '해방군' 독일군을 환영한 것이다.

    그들은 왜 소련을 버리고 독일을 지지했을까?

    그건 스탈린이 주도한 소련 공산당의 우크라이나 민족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착취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독립을 희구하는 우크라이나 민족을 이 기름진 땅에서 밀어내고 그 옥토에 슬라브 민족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전쟁 전까지 9백만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거나,아니면 1930년대의 대기근 때 굶어 죽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지배자 독일이 원수같은 소련을 무너뜨리고 나면 자기들만의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 결과 수십만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군에 들어가고, 물자나 노동력 제공을 아끼지 않았다.

    독일이 패망한 뒤에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무장단체들은 5년간 소련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을 끈질기게 벌였다.

    이런 정서 속에서 영화 <해바라기>에 나오듯이 우크라이나인들은 패잔병으로 떠도는 독일쪽 병사들을 숨겨주고 목숨을 구해줬다.

    아직도 우크라이나 국민들 머리 속에는 소련 공산당의 무지막지한 탄압과 독일과 손잡고 소련군에 대항해 싸우다 죽어갔던 그 처절한 기억이 남아 있다.

    크림반도 지도 스마트뉴스팀

     

    ▣"나찌 독일에 맞서 결사항전을 벌인 크림반도 주민들"


    슬라브민족이 다수를 이루는 크림반도 주민들은 우크라이나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주민들 전체가 주둔한 군인들과 함께 최후의 1인까지 독일군에 맞서기로 했다.

    특히 크림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세바스토폴 항구는 소련이 지중해로 진출하는 길목이자, 흑해를 지키는 함대의 거점이었고, 소련 해병대의 고향이자 본거지였다.

    소련을 침공한 1941년에 독일군이 질풍노도와 같이 레닌그라드로, 모스크바로, 키에프로 달려가고 있는 동안에도 그 남쪽인 크림반도는 맹공격을 견디고 소련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

    힘겹게 크림반도를 먹어들어간 독일군 앞에 세바스토폴항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소련군 정예 해병대원 10만명과 공산당 청년동맹의 소년.소녀들이 총을 들었고,흑해함대의 대포도 가세해 항구를 지켰다.

    1차 공격에서 실패한 독일군 최고의 전략가 만슈타인 장군은 해를 넘긴 1942년 2차 공격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각 전선에서 1,300문의 대포를 끌고 오고, 급기야는 포신 길이 32m, 구경 800mm의 대형대포 '도라'와 구경 450mm의 '파리 포'까지 배치한다.

    이들이 세바스토폴 요새를 때리는 모습을 독일군의 한 장교는 이렇게 회고했다.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다. 개전이래 이같은 무시무시한 포격을 본 적이 없다. 포연과 튀어오르는 돌가루로 요새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계산에 의해 그 먼지구름 속으로 계속 폭탄을 날렸다"

    그후 이어진 치열한 시가전 끝에 세바스토폴항은 함락됐지만 이 항전으로 독일군의 진격계획은 엉망이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소련군은 똑같은 방식으로 독일군에게 보복하고 크림반도를 수복한다.

    이 전투는 러시아 역사에서 <레닌그라드 사수="">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3대 대첩으로 기록되었다.

    이 자랑스런 역사를 묻어버리고 크림반도 주민들이 러시아를 버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러시아와 크림반도는 처절하고 기나긴 전쟁을 통해 피를 나눈 혈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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