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기록보관 담당자가 목숨을 걸고 베껴 쓴 2천 쪽 분량의 첩보기밀 자료가 22년 만에 대중에 공개됐다.
미국 행정부 고위관료 포섭작전부터 영국의 원자폭탄 제조기술을 빼내기 위한 이중첩자 고용작전까지 냉전시대 KGB의 첩보활동이 망라된 자료다.
AP통신과 영국 일간 가디언 등 외신은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처칠아카이브센터에 보관돼온 이 방대한 자료가 7일(현지시간) 대중에 공개됐다고 전했다.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KGB의 실제 활동내역을 대중이 직접 보게 된 데는 KGB에서 해외기밀 이송 감독 업무를 맡고 있던 바실리 미트로킨의 공이 컸다.
KGB 소속이었지만 속으론 공산주의 체제에 환멸을 느꼈던 그는 1972년부터 첩보자료를 몰래 집에 가져가 손으로 베껴 쓴 다음 타자로 쳐서 책으로 묶었다.
책 한 권이 만들어지면 '저주받은 체제', '쥐덫' 같은 제목을 달았다. 1984년까지 12년간 베껴 쓴 자료가 상자 19개 분량에 달했다.
발각되면 끝이라는 생각에 시골집의 우유통에 자료를 넣어 땅에 묻는 방식으로 KGB의 삼엄한 감시를 피했다.
그러다 세상이 바뀌고 1991년 옛 소련이 붕괴했다. 다음해인 1992년 미트로킨은 라트비아의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망명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이어 영국대사관을 찾아갔고 차 한잔하겠느냐며 다정하게 맞아준 영국대사관에 기밀 전부를 넘겼다. 영국과 미국 정보당국의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미트로킨은 가명을 쓰고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여생을 영국에서 보내다 2004년 81세로 눈을 감았다.
미트로킨의 존재는 1999년 크리스토퍼 앤드루 케임브리지대 역사학과 교수가 미트로킨의 자료를 토대로 책을 출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멜리타 노우드라는 87세의 평범한 영국 할머니가 1930년대 KGB 요원으로 특채돼 영국의 원자폭탄 개발 기밀을 소련에 넘겨온 스파이라는 사실을 비롯해 소련에서 몰래 훈장과 연금을 받으며 첩자 노릇을 했던 영국 인사들이 여럿 폭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