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폐기한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오른쪽)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이 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법원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를 공모한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2012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당시 서해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한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 발언에서부터 촉발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 의혹은 2년 3개월여 만에야 첫 법적 판단을 받게 됐다.
대법원까지 얼마든지 결과가 뒤집힐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1심 재판부의 무죄 선고가 몰고올 후폭풍은 정치·사회적으로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우선 수사단계에서부터 편파·불공정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검찰은 '정치검찰의 무리한 기소'라는 비판의 역풍을 면키 어렵게 됐다.
◇ 檢이 참여정부 인사들에게 적용한 혐의 대부분 인정 안돼 2013년 11월, 사건을 수사한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김광수 부장검사)는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죄와 공용전자기록 등 손상죄를 적용해 백종천 전 실장과 조명균 전 청와대 비서관을 불구속 기소한다고 밝혔다.
당시 검찰은 백 전 실장 등이 노 전 대통령의 지시로 회의록 초안을 삭제했고, 회의록 최종본이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지 않은 경위 역시 단순 실수가 아니라 당시 청와대가 고의로 회의록을 이관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쟁점이 됐던 회의록 초안의 성격을 '대통령기록물'로 확정하고, 백 전 실장 등이 회의록 초안 삭제와 관련한 형사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사법적 책임은 백 전 실장에게 물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시'를 부각시키며 회의록 초안 폐기의 책임을 사실상 숨진 전직 대통령에게 돌린 셈이다.
더 나아가 검찰 수사결과는 '노 전 대통령이 NLL 포기발언을 은폐하기 위해 회의록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는 새누리당 주장에 논리적 뒷받침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초안의 성격을 '대통령기록물'로 본 검찰의 판단을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이동근 부장판사)는 "기록물 '생산'으로 보려면 결재권자가 내용을 승인해 공문서로 성립시키려는 의사가 있어야 한다"며 "이 사건 기록의 경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승인'이 아닌 '재검토·수정' 지시를 명백히 내리고 있으므로 대통령 기록물로 생산됐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노 전 대통령이 '처리의견'란에 "내용을 한번 더 다듬어 놓자는 뜻으로 재검토로 합니다"로 기재한 것에서 이같은 판단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재판부는 또 회의록 초본의 경우 당연히 폐기돼야 할 대상이라며 공용전자기록 손상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회의록 파일처럼 녹음자료를 기초로 해서 대화내용을 녹취한 자료의 경우 최종적인 완성본 이전 단계의 초본들은 독립해 사용될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완성된 파일과 혼동될 우려도 있어 속성상 폐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회의록 최종본을 완성한 뒤에는 미완성 문건 성격의 회의록 초본은 남겨둘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삭제했고, 회의록 최종본 역시 단순 실수로 이관하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는 참여정부측 인사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검찰이 여당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무리한 기소를 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 '동전의 양면' 여당 의원 사건은 약식기소, 끊이지 않는 불공정 논란
새누리당이 회의록의 의도적 폐기 가능성을 제기하며 2013년 7월 참여정부 관계자들을 고발하자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수사를 진행해 나갔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 등 관련자를 출국 금지하고 그해 8월 경기도 성남의 대통령기록관에 대한 사상 두 번째 압수수색을 벌였다.
압수수색과 분석작업의 양과 질은 어마어마했다.
디지털자료 분석용 특수차량까지 동원해 755만건의 기록물을 분석하며 91일간의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통해 회의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고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전 복사해간 '봉하 이지원'에서 회의록 초본이 삭제된 흔적과 완성본에 가까운 수정본을 발견했다.
검찰은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을 수사에 착수한지 4개월만인 같은해 11월 불구속 기소하고 결심공판에서 각각 징역 2년형의 중형을 구형했다.
수사대상의 양이나 범위 등을 고려해볼때 이레적이라 할 정도의 신속한 수사였다.
하지만 '회의록 폐기' 사건과 동전의 양면 같았던 '회의록 내용 유출'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는 진행조차 쉽지 않았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이현철 부장검사)는 지난해 6월 야당이 고발한 김무성 의원과 서상기,·조원진, 조명철, 윤재옥 의원, 권영세 주중대사,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 등을 모두 무혐의 처분했다.
다만 김무성 의원에게 대화록 내용을 누설한 같은 당 정문헌 의원만은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했다.
야당의 2012년 10월 검찰에 고발한지 1년 8개월여 만에 내린 결론이다.
법리적으로 논란이 됐던 회의록 초본 폐기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기소했던 검찰이 정황적으로 봐도 위법성이 분명해 보였던 여당 의원들의 회의록 내용 누설 부분에 대해서는 이빠진 칼을 휘두른 셈이다.
검찰의 약식기소에 결정에 대해서는 오히려 법원이 정 의원을 정식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하면서 검찰을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다.
법원은 정 의원에게 검찰이 구형한 벌금 500만원보다 높은 벌금 1천만원을 선고했고 정 의원과 검찰 모두 항소를 포기하면서 형이 확정됐다.
여야에 대한 검찰의 유독 다른 잣대는 대화록 관련 수사 과정에서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2013년 참여정부 인사들의 '회의록 폐기' 수사를 진두지휘했던 이진한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는 '회의록 내용 유출' 수사와 관련해 김무성 의원은 소환조차 하지 않고 서면조사로 마무리 지을 예정이라는 언론보도를 정면 부인하다 김 의원실에서 서면조사 답변서를 작성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기자들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 선거전에 악용된 국가기밀, 정치권 후폭풍 불가피할 듯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관련 수사는 대통령 선거전을 앞둔 정치권의 색깔공세가 검찰 수사로 번진 나쁜 선례로 남게될 전망이다.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2012년 대선을 2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주장한 '노무현 NLL 포기 발언' 논란으로 심각한 국론분열의 후유증이 지속됐으며, 1심재판에서 참여정부 인사들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나오면서 이같은 진영논쟁은 또다시 불붙을 전망이다.
{RELNEWS:right}당사자 격인 노무현재단은 6일 "이제 심판은 정치검찰과 새누리당이 받아야 한다"고 포문을 열었다.
노무현재단은 "상식과 합리에 입각한 당연한 결과이자 정치검찰의 표적수사와 억지주장에 대한 사법부의 엄중한 경고라고 본다"고 평가했다.
노무현재단은 "검찰이 "꿰맞추기 수사, 자가당착 주장으로 일관했다"며 "수사는 물론 공판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모욕주기에 열을 올렸다"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