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뉴스의 행간을 속 시원히 짚어 줍니다. [Why뉴스]는 CBS 라디오 <박재홍의 뉴스쇼="">를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박재홍의>
■ 방송 : 권영철의 Why뉴스
■ 채널 : 표준 FM 98.1 (07:30~09:00)
■ 진행 : 박재홍 앵커
■ 대담 : 권영철 CBS 선임기자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자료사진)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공전되고 있다. 야당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팀에서 근무한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청문회를 보이콧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야당내의 기류가 청문회 개최 반대에서 청문회는 열자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오늘 [Why뉴스]에서는 "야당은 왜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안 세우려 하나?" 라는 주제로 그 속사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 야당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 건가?= 아직 공식적으로 청문회를 열자는 쪽으로 완전히 돌아선 건 아니다. 그렇지만 초기 청문회를 보이콧 하자는 기류였지만 지금은 고민을 하자거나 청문회는 열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류로 바뀌고 있다.
여야 원내지도부는 9일 밤에도 접촉을 갖고 박상옥 후보자 인사청문회 문제 등을 두고 논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고 10일 오후 원내대표 주례회동에서 이 문제를 논의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의원은 "내부적으로 강경의원들을 대상으로 설득작업을 하고 있다"면서 "오늘 당장은 아니더라도 청문회에 합의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전해철 새정치민주엽합 의원도 지금까지의 강경입장과 달리 "고민하고 있다"면서 기류 변화가능성을 내비쳤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는 9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주례회동을 통해) 청문회를 하겠다는 것인지, 거부한다는 것인지 담판을 짓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 박상옥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는 되는 거냐?= 아직은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야당의 기류변화가 뚜렷이 감지되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늦어도 3월 하순 이전에는 청문회가 열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고위당직자는 "청문회에 합의하더라도 모든 청문회가 끝난 뒤에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야당과 시민단체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지만 박상옥 후보자에 대한 반대 명분이 약하다는 한계가 있어서 청문회가 열릴 가능성이 높다.
▶ 그게 무슨 소리냐? 반대 명분이 약하다니?= 새정치연합 등 야당 소속 인사청문위원들은 "박상옥 후보자는 한국사회 전체가 독재와 맞서 싸우며 민주화의 염원을 이뤄나가던 시기에 독재의 편에서 침묵했다"고 비판하면서 자진사퇴를 촉구해왔다.
그 이유가 박 후보자는 1987년 검사 시절 서울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1차와 2차 수사팀에 참가해 경찰의 은폐 조작을 적극적으로 밝혀내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사건을 다시 되돌아보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검찰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또 하나의 의문사로 남겨졌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 검찰이 노력해서 고문치사 사건이 밝혀졌다는 것이냐?
박종철사건을 다룬 안상수의 '이제서야 마침표를 찍는다'
= 검찰이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앞장선 것은 아니지만 검찰의 노력이 없었다면 박종철사건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게 사실이다.
1차적으로는 박종철군 사체에 대한 부검을 실시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최환 전 부산고검장은 "경찰이 14일 밤에 찾아와서 그날 밤 안으로 적당히 화장해서 묻어버리겠다면서 없던 일로 해달라고 했다"면서 "그걸 결사적으로 막았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런 경찰을 설득해 내일 아침(15일)에 변사사건 발생보고서를 용산서장 이름으로 갖고 오라고 하면서 혹시라도 밤사이에 사체를 없애 버릴지도 몰라서(이미 화장팀을 대시시키고 온 상황) 시신에 손대지 못하게 '사체보전명령'을 했다고 회고했다. 이 조치를 한 덕분에 부검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부검을 하지 못했더라면 박종철군의 물고문 사건은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박종철 기념사업회'에서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2차적으로는 부검을 한 뒤 은폐 조작을 하지 않고 부검보고서가 제대로 제출되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경찰이 물고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국과수 황적준 박사가 양심적으로 했다고 당시 안상수 검사도 책에서 밝혔다. 황적준 박사의 일기장으로 인해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구속되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을 큰 그림으로 보자면 검찰은 어쨌건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것과 축소은폐가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 그리고 경찰총수인 치안본부장까지 구속하면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과 은폐조작 사건의 실체를 밝혀냈다. 경찰과 안기부는 끝까지 축소은폐를 시도했지만 검찰은 실체적 진실을 밝혀냈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당시의 상황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이른바 부천서 성고문사건을 당시 인천지방검찰청에서 부천서 경찰관 문귀동의 성고문 사실을 밝혀내고도 상부의 지시에 의해 그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단순 폭행으로 입건해 기소유예처분을 한 다음 수사검사들이 모두 울었다는 것이었다."(안상수 '이제서야 마침표를 찍는다' 중에서 p21)
지금에 와서는 검찰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유출이나 지난 대선과정에서의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 등 실체적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때로는 안하는 사건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당시 검찰의 역할은 인정하고 평가해야 한다.
▶ 그렇지만 1차 수사에서 2명만이 고문에 가담했다고 축소은폐한 건 사실 아니냐?= 1차수사로 인해 검찰이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 박상옥 검사도 28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 책임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당시 상황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이었고 안기부와 치안본부가 검찰보다 더 설치던 상황이었다. 이른바 관계기관대책회의라는 게 청와대와 안기부 경찰, 검찰, 군 등 권력기관 대부분이 참석했는데 검찰은 발언권이 약했다고 한다.
당시 1차 수사는 당연히 부검으로 물고문 사실을 확인한 검찰이 해야 했지만 경찰특수수대에서 맡았다.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경찰이 수사해서 송치한 사건을 그대로 기소하는 역할만 떠맡았던 것이다.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 경찰은 사건발생 닷새만인 1월 19일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를 구속한 뒤 바로 다음날인 20일 사건을 송치한다. 그리고 검찰은 나흘만인 24일에 2명을 구속기소하고 수사결과를 발표한다. 속전속결이었었다. 이런 방침이 이미 정권차원에서 결정되었다는 얘기다.
물론 그렇다고 검찰의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책임을 물으려면 말석 초임검사에게 물을게 아니라 당시의 권력자 전두환 전 대통령 장세동 전 안기부장 당시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 등에게 물어야 한다.
특히 그 사건이후 당시 정구영 서울지검장은 검찰총장을 지냈고 당시 주임검사였던 신창언 부장검사는 검사장으로 승진한 뒤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 헌법재판관으로 영전했으며 안상수 검사는 그 해 검찰에서 사직한 뒤 정치권으로 진출해 5선의원에 여당 원내대표와 당대표를 역임한 뒤 지금은 경남 창원시장을 하고 있다. 2차 수사에 합류했던 이승구 검사는 검사장으로 승진했고 막내였던 박상옥 검사는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5년 검사장으로 승진한 뒤 MB정부 시절인 2009년 서울북부지검장을 끝으로 검찰에서 퇴직했다.
검찰의 1차수사가 잘못된 책임을 묻고자 했다면 그 이전에 물었어야 했는데 김대중, 노무현 민주정부 10년 동안 관련자들이 승승장구했는데 이제 와서 당시 초임검사였고 막내였던 박상옥 후보자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건 어딘지 군색해 보인다.
▶ 당시 수사기록 봤나?
박종철사건 수사기록
= 받아서 훑어봤다. 1차 수사기록이 700페이지가 넘고 2차 수사기록이 300페이지가 넘는다.
▶ 수사기록을 보면 박상옥 검사가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난다고 하는데?= 몇몇 언론보도에서 그런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또 '박종철열사 기념사업회' 김혁규 사무국장도 에 출연해서 "실제로 그 당시에 5공화국 군사정권의 방침,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나온 방침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단순히 따랐다기보다도 그것에 아주 충실하게, 아주 철저하게 그리고 자신의 역할은 그런 것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이해한 속에서 움직인 것이 아닌가 오히려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 됐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지만 1차 수사기록을 보면 박상옥 검사가 고문에 가담했던 경찰관 반금곤 경장에 대한 심문조서에 "진술인은 피의자들이 박종철에게 욕조물이 집어넣는 등 폭행을 할 때 합세한 사실이 없는가요?" 라고 질문하고 반금곤이 저는 14호실(하종문 조사실)에 있었기 때문에 9호실에 일어난 일은 전혀 모르며, 가세한 사실은 전혀 없습니다"라고 답변한다.
이 대목을 성의 없이 형식적으로 질문하고 말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조서를 펜으로 직접 작성하거나 구형 타자기로 작성할 때다. 당시 수사에 관여했던 검찰관계자는 "그런 질문이 조서에 담기기 전에 여러 차례의 관련 얘기들이 오고간 뒤였다"고 전했다.
안상수 '이제서야 마침표를 찍는다' 중에서
실제로 검찰이 2차 수사에서 밝혀낸 사실에 의하더라도 이미 경찰은 조한경, 강진규 2명이 고문한 것으로 조작하기로 하고 사전에 예행연습까지 할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하고 입을 맞춘 뒤였다. (안상수 책 217페이지)
당시의 검찰수사결과를 보면 "경찰은 사건발생 당일인 1월 14일 오후 5시경 치안본부 대공 3부 사무실에서 고문경찰관 5명이 모여 '조 경위 등 2명이 수사하다 박 군이 졸도 사망한 것'으로 구두로 합의했고 1월 15일 박원택 경정이 고문경찰관 5명을 불러 이들이 구두 약속한대로 조서 받는 연습을 하게하고 각자의 역할을 숙지시켰으며, 1월 17일 유정방 경정이 조 경위 등 2명이 범행 모두를 뒤집어쓰도록 설득했다. 1월 18일에는 동료경찰관 10여명이 회유를 했고 박처원 치안감이 두 사람이 책임을 지라고 설득을 했다"는 것이다. 박 치안감은 조한경과 강진규 명의로 은행에 개발신탁장기예금 5천만원 두 구좌씩 2억원에 가입한 뒤 회유를 한다"는 내용 등이다.
그런 상황에서 박상옥 검사가 축소 은폐를 제대로 밝혀내려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게 적절한 지는 따져봐야 한다.
지금에 와서 결과론적으로 검찰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 아니냐? 박상옥은 왜 독재정권에 항거해서 은폐된 사실을 밝히려고 노력하지 않았느냐? 라고 책임을 추궁하는 게 적절한 지 고민할 부분이다. 당시 박상옥 검사가 잘했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지금의 잣대로 당시를 재단해서 심판하자는 게 적절하냐는 것이다.
당시 최환 공안부장도 "1차 수사는 엉망이었다"면서 "축소 수사했던 검사들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그걸 안하고 넘어갔다. 직무유기로 혼이 났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책임을 물으려면 당시 주임검사였던 신창언 부장검사와 수석검사였던 안상수 검사에게 물어야 한다"면서 "이제 와서 박상옥 후보자에게 책임을 지운다는 건 무리다" 라고 덧붙였다.
안상수 검사는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는 제목의 (부제 :박종철사건 수사검사의 일기) 책에서 "사실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에서 그 정권유지를 위해 노력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이나 안기부에 대하여서까지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지기는 힘든 분위기 였다"고 실토하고 있다.
그래서 이한성 새누리당 의원은 CBS 박재홍의 뉴스쇼에 출연해서 "책임을 진다면 당시 검찰총장과 법무부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외압을 막아내면서 검사들이 수사를 하도록 장려해야 되는데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했고 일선검사들로서는 물론 아쉬움이 많았던 상황"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 박상옥 후보자가 1차 수사와 2차 수사에만 관여했고 3차 수사에는 제외된 거냐?= 당시 상황을 다시 복기해보면 1차 수사팀에 포함돼서 조한경, 강진규 2명을 구속기소하고 3월 16일에 여주지청으로 발령이 났다.
고문경찰관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이 2월 27일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조한경 경위의 진술이 나오면서 알려졌지만 박상옥 검사가 그 과정에서 이를 알았는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검찰수뇌부는 그런 사실을 보고받고도 차일피일 미루면서 안기부와 경찰이 은폐 조작을 할 시간을 벌어줬다. 이 대목이 검찰이 큰 공을 세우고도 난감해 하는 부분이다.
2차 수사는 박상옥 후보자가 여주지청에 근무하던 때인 5월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영등포구치소에서 수감 중이던 이부영(재야운동가 후일 민주당 최고위원) 전 의원의 쪽지를 폭로하면서 5월 20일에서야 검찰이 재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안상수 창원시장의 책을 보면 당시 검찰을 압박하는 안기부의 집요한 공작과 경찰의 은폐조작 사실 등이 드러난다.
2차 수사는 검찰의 의지가 아니라 외부의 압력에 의해 마지못해 착수한 수사였다. 수사과정에서도 시민들과 야당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면서 전두환 정권은 전면개각을 단행한다. 그게 5월 26일이었다. 검찰총장이 서동권에서 이종남으로 바뀌었는데 27일 취임한 이종남 검찰총장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수사를 서울지검이 아닌 대검 중수부에서 맡도록 한다. 3차 수사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한영석 중수부장은 "수사주체를 바꾼 것은 사실상 이번 수사를 맡아 온 서울지검에 대한 '감사'의 성격을 지닌다고 말하기도 했다.
검찰은 3차수사가 시작된 지 이틀만인 29일 수사결과를 발표한다. 수사 이틀 만에 축소조작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은 1차와 2차 수사팀이 축소·은폐·조작에 대해 나름 충실하게 수사를 해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당시 수사팀에 관여한 검찰관계자가 전했다. 특히 안상수 검사와 박상옥 검사는 공식적인 수사팀에서는 제외됐지만 수사팀에서 활동하면서 적극 협력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당시에도 검찰은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을 구속하지는 못했다. 이듬해 동아일보의 특종보도가 나온 뒤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이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게 된다.
▶ 박상옥 검사의 입장은 들어봤나?=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다. 다만 박상옥 후보자는 "지금은 청문회 준비 중이다. 공식적인 언론인터뷰는 하지 않고 있다. 의문이나 의혹에 대해서는 청문회에서 밝히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밝히고 있다.
박상옥 후보자는 주변에 "병역기피나 투기나 위장전입 같은 개인적인 문제라면 해명을 하겠지만 '박종철 사건'은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큰 역사적인 사건이어서 일일이 해명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 박상옥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 여부는 국회가 결정할 사안이다. 여·야간 합의가 끝내 이뤄지지 못한다면 정의화 국회의장이 본회의에 임명동의안을 직권상정 할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