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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작렬] 1997년 한국, 그리스처럼 할 수 있었을까

기자수첩

    [뒤끝작렬] 1997년 한국, 그리스처럼 할 수 있었을까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자료사진)

     

    빈털터리가 돼 길거리에 나앉게 된 신용불량자나 나라 곳간이 텅텅 비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국가의 신세나 별반 차이는 없다.

    선택지라고 해봐야 돈을 빌린 뒤 고통스런 허리띠 졸라매기를 하거나, 아니면 못 갚겠다고 드러눕고 협상을 하거나, 손벌리지 않고 내핍을 견디며 자구책을 찾는 방법 정도가 있을 것이다. (물론 기축통화를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미국은 얘기가 좀 다르다.)

    예를 들면 1997년 한국은 IMF에 급전을 빌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돈을 빌려준 IMF는 빚 독촉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안방을 차지하고 앉아 모든 경제권을 쥐고 흔들었다. 외환 보유를 높이기 위한 고금리 정책으로 기업은 줄도산 했고 가장들은 일자리를 잃고 양복을 차려입은 채 눈물의 등산길에 나서야 했다. 외환보유고를 높인다는 명목 하에, 고용과 내수 여력이 고갈됐지만 어쩔 수 없이 이를 감내해야했다.

    비슷한 시기 돈줄이 말라버렸던 말레이시아의 경우는 밖으로 손을 벌리는 구제금융 대신, 내핍을 선택했다. 차라리 길바닥에 나앉자는 식이었다. 오히려 외환 유출을 통제하고 고정환율제를 채택한 뒤 자국 통화를 회수하며 견디기에 들어갔다. 바깥 문을 닫고 내수 부양을 택한, 한국과는 정반대의 접근법이었다.

    1998년 러시아처럼 모라토리엄(지급불능)을 선언하고 배째라 식으로 드러눕는 방법도 있다.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러시아 국민들은 생필품 가게와 환전소에 장사진을 치는 등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한 끝에 채무를 30% 탕감 받고, 구제금융 체제로 들어갔다. 공교롭게 이 당시에도 최대 채권국은 독일이었다.

    ◇ 한국, 말레이시아, 러시아…구제금융에 대처하는 3가지 방법

    그렇다면 당시 외환보유고가 바닥났던 우리나라가 말레이시아나 러시아의 전략을 택할 수 있었을까.

    물론 가보지 않은 길을 놓고 그 결과를 논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원도 없고 내수시장도 적어 결국 수출로 먹고사는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의 경우는 말레이시아처럼 외환시장의 문을 닫을 수도 없었고, 러시아처럼 버티기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은 자명하다.

    극심한 고통이 수반됐지만 나름 처한 상황에서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고, 실제로 우리는 불과 3년 8개월 만에 구제금융을 졸업했다.

    반대로 말레이시아는 풍부한 자원과 내수 시장이 있었다. 거기에 미국의 지배를 벗어나있는 또 다른 금융질서가 있었다. 다름아닌 이슬람권 금융, 즉 '수쿠크'다. 특히나 2001년 미국의 9.11 사태 이후에는 갈 곳을 잃은 오일머니가 말레이시아의 수쿠크 채권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런가하면 러시아는 냉전시대 초강대국이었고, 1998년 당시에도 여전히 과거 소비에트 연방 국가들의 맹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핵무기 보유국이라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벼랑 끝' 전술을 구사했다. 게다가 러시아는 자원 부국이기도 하다.

    여하튼 구제금융의 위기에 처한 국가들이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이면에는,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고, 각기 다른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그렉시트'라는 협상 카드

    외환위기 당시 서울 시내 주요 지하철 역에서 갈 곳 없는 노숙자들이 자리를 차지한 채 잠을 자고 있다. (자료사진)

     

    그리스가 국민투표를 통해 채권단의 긴축안에 '반대'(OXI)표를 던지고 '드러눕기'에 나선 것도 어찌 보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우리와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도덕적 해이 문제로 단순히 몰아붙일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스는 유로존 탈퇴, 즉 '그렉시트'라는 중요한 협상카드를 갖고 있다.

    유로존은 유로화를 쓰는 단일 통화체제다. 유로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 나라의 수출과 수입의 균형을 맞춰주는 '환율'이라는 안전판을 포기해야 한다. 결국 생산성이 떨어지는 나라는 환율을 조절할 수 없어서 적자가 쌓이게 된다. 이때는 자국의 임금과 물가를 떨어뜨려 생산성 격차를 조절하는데, 그리스는 그 대신 재정을 투입해 이를 보완하다 결국 재정이 바닥을 드러냈다.

    사실 같은 나라라면 생산성이 떨어지는 지역에 재정보조금을 주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정태인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장은 "강원도와 서울이 생산력 격차 때문에 강원도가 못살게 된다고 하면 세금을 걷어서 강원도에 보조금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로존은 같은 돈을 쓰지만 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정 소장은 "유럽은 재정통합이 안 돼 있으니까 독일이 흑자가 났으면 거기서 세수가 더 많이 걷혔어도 이걸 그리스에 주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스 문제는 결국 단일 통화를 사용하면서 국가 간 격차가 발생하는데, 이 부담을 유로존이 어디까지 감내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만약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유로존이 그리스 부담을 떠맡기를 포기할 경우,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 사정이 비슷한 남유럽 국가들도 자신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남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 파국은 원치않아…새로운 협상 가능성

    (사진=유튜브 영상 캡처)

     

    그래서 그렉시트는 다른 국가들의 유로존 이탈 도미도의 첫 시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프랑스와 독일이 주도하는 유로존 체제가 못마땅한 영국이 EU 탈퇴까지 언급하며 정치적으로 흔들기에 나서고 있다.(영국은 EU국가이지만 자체 통화를 쓰고 있어 유로존은 아니다.) 자칫 그리스를 도화선으로 유로존은 물론 유럽연합 체제 자체가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그리스는 유럽통합의 정신적 뿌리인 서구문명의 발상지라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지리적으로 중동에 인접한 매우 전략적인 위치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떨어져나가면 러시아나 중국과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EU는 물론이고 미국도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때문에 '그렉시트' 카드는 여러모로 그리스에게 중요한 협상 전략이고,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는 '긴축안 반대'라는 벼랑 끝 전술을 활용할 수 있다. 게다가 국민투표를 통해 명분도 쌓았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공공연하게 30% 채무탕감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유로존을 이끌고 있는 독일은 그리스에 퍼주기를 시작했다가는 다른 유로존 국가까지 모두 재정보조를 해주는 상황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 문제에 매우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른바 '시범케이스'다.

    {RELNEWS:right}하지만 모두 그렉시트라는 파국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협상의 여지는 남아있다. IMF는 그리스 채무를 30% 탕감해야 한다는 보고서까지 검토했다. 또 독일 메르켈 총리도 그리스가 오는 9일까지 개혁안을 가져오면, 12일 유럽연합(EU) 28개국 정상들이 이 제안을 토대로 그리스에 대한 지원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쯤되면 외환위기 당시 우리나라가 너무 순진하게 구제금융 채권단(IMF)의 요구를 순순하게 들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각 나라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믿는 구석도 다르다. 여하튼 우리는 구제금융을 모범적으로 졸업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은 지금까지도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그리스 사태를 보면서 그들이 우리처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이유도 없고, 우리가 그리스처럼 하지 않았다고 이제와서 후회할 이유도 없다. 그저 그리스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일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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