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옷을 걸치고 시상식에 참석한 마이클 스미스(AP=연합뉴스)
매년 이맘때면 노벨상 수상자 발표(10월 초)를 앞두고 시선을 잡아끄는 '짝퉁 노벨상'이 하나 있다.
바로 올해로 제정 25주년을 맞은 '이그노벨상'이다.
'이그노벨'은 '있을 것 같지 않은 진짜'(Improbable Genuine)라는 말과 노벨(Nobel)이 합쳐진 말이다.
하버드대 과학 유머잡지 AIR(Annals of Improbable Research)가 1991년 제정한 이 상은 노벨상을 풍자하려는 의도도 다소 엿보이지만, 기발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집념으로 연결시킨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면 노벨상에 대한 '경의'가 느껴진다는 평도 나온다.
◇ 하루 5번씩 38일간 벌침에 쏘인 대학원생
지난 17일(현지시간) 발표된 제25회 이그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벌침의 고통을 연구하기 위해 무려 200번 가까이나 벌에 쏘인 연구원이다.
코넬대에서 곤충의 행동을 연구하던 대학원생 마이클 스미스는 지난 2012년 벌에 쏘이면 어디가 가장 아픈지 알아내기 위해 직접 벌에 쏘이는 실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실험은 매일 아침 9시에서 10시 사이 벌을 핀셋으로 집어 신체 각 부위에 갖다대고 벌이 침을 쏠 때까지 누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렇게 하루 다섯 군데씩 38일간, 25개 서로 다른 신체 부위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거의 200번 가까이나 벌에 쏘인 것이다.
스미스는 1분 동안 벌이 침을 쏘게 한 뒤에 신체 부위별 벌침의 고통을 0부터 10까지의 숫자로 매겼다.
실험 결과 가장 아픈 부위는 콧구멍(9.0), 윗입술(8.7), 성기(7.3) 등이었고, 가장 덜 아픈 곳은 정수리, 팔뚝, 가운뎃발가락(모두 2.3)으로 나타났다.
그는 지난해 4월 내셔널지오그래픽 등에 소개된 논문에서 "정수리 침은 마치 계란을 머리에 내려치는 느낌이었지만 그렇게 아프진 않았다"고 적었다.
반면 "콧구멍에 쏘인 침은 재채기가 나고 숨이 가쁘고 콧물이 질질 흐를 만큼, 온몸이 반응하는 아픔이었다"고 회고했다.
스미스와 올해 이그노벨상을 함께 수상한 곤충학자 저스틴 슈미트의 '곤충 침 고통 지수'(sting pain index)도 눈길을 끈다.
스미스가 벌침의 고통을 신체 부위별로 구분했다면, 슈미트는 곤충의 종류별로, 총 78가지 침의 고통을 1~4의 지수로 매겼다.
특히 말벌(hornet)은 '진하고, 강하고, 약간은 으스러지는 듯한', 땅벌(yellow jacket)은 '뜨겁게 그을리는, 담뱃불을 당신의 혀에 짓이겨 끄는 듯한' 등 고통의 느낌을 묘사한 표현들은 소믈리에의 와인 감별에 필적할 정도라는 평가다.
◇ 궁금증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열정 이그노벨상 수상자들의 공통점은 불현듯 떠오른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미스의 벌침 연구도 어느 날 우연히 그의 반바지 속으로 들어온 꿀벌이 그의 '중요부위'를 쏘고 달아난 사건에서 비롯됐다.
스미스는 내셔널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에서 "벌을 연구하다 보면 종종 벌들이 반바지 속으로 들어오는데, 생각했던 만큼 침이 아프지 않아 놀랐다"면서 그때 "벌에 쏘이면 어디가 가장 아플까"란 생각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욕을 하면 고통을 더 잘 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욕설요법'으로 2010년 이그노벨상을 수상한 영국 킬대학 강사 리처드 스텐프스도 과거의 경험이 연구의 출발점이 됐다.
수년 전 망치로 손을 찧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더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 그는 피실험자들에게 얼음물 통에 손을 담그게 한 뒤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측정했고, 그 결과 입이 거친 사람들이 더 오래 참는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차를 타고 과속방지턱을 '쿵'하고 넘을 때 얼마나 아픈지에 따라 맹장염을 진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 올해 의학분야 이그노벨상을 받은 연구팀도 의사들의 '잡담'을 흘려듣지 않은 경우다.
급성 맹장염으로 병원에 온 환자들이 한결같이 "차를 타고 병원으로 오는 길이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 "유머는 나의 힘" 수상자들의 연구는 '처음엔 웃게 하지만, 다음엔 생각하게 한다'(first makes you laugh, then think)는 이그노벨상의 모토에 충실하다.
'브래지어 방독면'을 개발해 2009년 공중보건 분야 이그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우크라이나 출신 과학자 엘레나 보드너 박사가 대표적이다.
방독면이 필요한 비상상황에서 여성들이 착용한 브래지어가 훌륭한 대체물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도 기발하지만, 보드너 박사는 특히 시상식에서 직접 착용하고 있던 브래지어를 꺼내 방독면으로 변신시키는 시범까지 보였다.
당시 시상자로 참석했던 폴 크루그먼(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오르한 파묵(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 등 노벨상 수상자들이 얼떨결에 당황하며 브래지어 방독면 착용 피실험자가 된 모습은 참석자들의 폭소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보드너 박사는 1986년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가 부족해 고통을 겪은 것을 계기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면서 화재 등 비상시에 브래지어를 반으로 잘라 후크로 연결해 머리에 쓰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시상식에서 "남성은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유방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인 것이 정말 멋지지 않은가. 여성들은 비상시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옆에 있는 남성 1명의 목숨도 살릴 수 있다"고 답했다.
벌침을 연구한 스미스도 지난 17일 열린 시상식에서 양복 위에 꿀벌 복장을 걸치고 나와 "너무 진지해져선 안된다. 과학에서도 유머는 정말 중요하다"며 "유머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것을 탐구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 일본 연구팀 단골 수상…한국 수상자도
노벨상 단골 수상국인 일본은 이그노벨상에서도 거의 매년 수상자를 배출해 각 분야를 망라한 과학강국임을 입증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바나나 껍질을 밟았을 때의 위험성을 과학적으로 풀어낸 일본 과학자들이 물리학상을, 2013년에는 심장을 이식한 쥐에게 오페라를 들려줬더니 거부반응이 적었다는 연구를 발표한 데이쿄(帝京)대 연구팀이 상을 받았다.
또 2011년엔 '불이 났을 때 잠든 이들을 깨우기 위해 고추냉이를 분사할 경우 어느 정도의 농도가 좋은지'를 연구한 일본팀이 화학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에도 일본 과학자가 동물 배설물로 바닐라 에센스를 만들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편 한국인 수상자로는 향기나는 신사복을 발명해 1999년 환경보호 부문상을 수상한 권혁호 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