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20:00)
■ 방송일 : 2015년 10월 20일 (화) 오후 7시 05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강종헌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피해자)
◇ 정관용> 1970년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서 감옥에서 청춘을 보냈던 피해자들이 오늘 그 사건들을 되돌아보는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이제 벌써 60대에 접어드신 이분들. 지난 40년 고통의 시간 다시 돌아보는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그 토론회에 참석하신 재일동포 강종헌 씨를 스튜디오에 직접 모셨습니다. 강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 강종헌> 안녕하십니까?
◇ 정관용> 오늘 토론회 제목이 ‘재일동포 정치범사건, 11·22사건 40년 토론회’네요. 11·22사건이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 강종헌> 75년 11월 22일에 그 당시 중앙정보부가 모국 유학생을 가장한 재일동포 간첩단들을 일망타진했다. 그런 사건을 공개를 했습니다. 그날입니다.
◇ 정관용> 아. 그래서 11·22사건이라고 하는군요.
◆ 강종헌> 네, 그렇게 하죠.
◇ 정관용> 이때 그러면 일망타진된 사람이 몇 명이었어요?
◆ 강종헌> 그때 저는 그 사건 1주일 후에 보안사령부에 연행돼서 들어갔습니다만 1차로 11·22로 들어간 분이 열두 분인가 됐을 거고 거기에 국내 학생들이 있어요. 모두 하면 30명가량 들어갔을 겁니다.
◇ 정관용> 재일동포유학생은 12명이었고 그러면 강 선생님은 11·22사건 직접 연관자가 아닌 거예요?
◆ 강종헌> 네, 제 친구들이 좀 들어가 있었지만 중앙정보부에서 큰 사건 터뜨리니까 보안사령부도 좀 해야 될 것 아니냐는 오더가 내려진 것 아니겠습니까? 가지고 있는 죄를 가지고 급히 만들어진 게 그 사건이었습니다.
◇ 정관용> 그럼 강종헌 씨는 11월 22일에서 일주일 지난 후에 터졌다?
◆ 강종헌> 네. 저는 11월 28일인가 연행됐습니다.
◇ 정관용> 연행 자체가. 그때 어떤 신분이었어요?
◆ 강종헌> 저는 그때 서울의대 본과 2학년이었습니다.
◇ 정관용> 태어나시기는 어디서 태어나셨어요?
◆ 강종헌> 일본에서 태어났죠.
◇ 정관용> 아버님은 그러면.
◆ 강종헌> 아버지는 1세인데요. 일제시대 1943년인가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셨어요.
◇ 정관용> 제주도 출신이시군요. 그리고 강 선생님은 일본에서 태어나셨고.
◆ 강종헌> 네, 저는 2세입니다.
◇ 정관용> 일본에서 학교를 그러면 어디까지 졸업하셨어요?
◆ 강종헌> 저는 고등학교까지는 일본학교를 다녔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왜 한국으로 유학을 오셨어요?
◆ 강종헌> 제 세대 재일동포들은 늘 그런 민족적인 자각이라고 할까요? 민족적인 정체성을 찾으면서 방황도 하고 고민도 하고 그런 사춘기를 보냅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처음에는 일본대학을 다닐 생각도 있었는데 물론 말도 모르고 우리 역사, 우리 문화에 대해서도 지식이 좀 부족하죠.
◇ 정관용> 고등학교 졸업하실 때까지 그러면 한국어를 못하셨어요?
◆ 강종헌> 몰랐습니다.
◇ 정관용> 집에서 한국말을 안 쓰셨나 보죠?
◆ 강종헌> 아버지는 1세니까 가끔 쓰시는데.
◇ 정관용> 가끔.
◆ 강종헌> 어머니는 2세였습니다.
◇ 정관용> 어머님도 재일동포 2세.
◆ 강종헌> 학교도 일본학교를 다니니까 아버지가 민족교육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겠죠. 그러나 그 당시 민단계 학교는 없었습니다.
◇ 정관용> 조총련계 학교는?
◆ 강종헌> 조총련계 학교는 있었죠. 하지만 조선학교를 보낼 생각은 없다 해서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 정관용> 조총련계 학교는 결국 북조선 계열의 학교니까.
◆ 강종헌> 그렇게 규정이 되잖아요.
◇ 정관용> 그렇죠. 거기는 보낼 수 없다.
◆ 강종헌> 아버지로서는 아들을 거기에 보내면 고향하고는 연이 끊어지죠.
◇ 정관용> 제주도하고는 멀어지니까. 그렇다고 민단계열의 한국학교도 없었고.
◆ 강종헌> 전혀 없는 건 아닌데요. 거기에 정부가 지원을 안 하니까 제대로 교육을 하겠습니까? 일본교과서를 쓰고 수업도 일본말로 하고.
◇ 정관용> 민단계인데도.
◆ 강종헌> 조선학교는 다 교육체계가 우리말로 돼 있으니까.
◇ 정관용> 조총련계 학교만.
◆ 강종헌> 네, 그렇게 하죠.
◇ 정관용> 그러니까 그 학교는 보내고 싶었으나 보낼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한국말을 못 가르쳤다.
◆ 강종헌> 네.
◇ 정관용> 그럼 한국말도 못하는 상태에서 서울대로 유학 올 결심은 더 어려웠을 텐데.
◆ 강종헌> 그래서 저한테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지금도 날짜를 잊어버리지 않는데 1970년 11월 13일 어떤 사건이 일어납니다.
◇ 정관용> 70년 11월 3일?
◆ 강종헌> 무슨 날인지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 정관용> 전태일?
◆ 강종헌> 맞습니다. 전태일 열사께서 분신자살을 하신 날인에 그 신문기사가 일본신문에 아주 토막기사로 작게 나왔어요. 그런데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죠. 전태일 열사가 저보다 두 살인가 세 살 위이신데 거의 같은 세대의 젊은 사람이 얼마나 고민을 하고 또 얼마나 그런 결심을 해서 그 큰일을 하셨을까 생각하니까 아무리 일본에서 사는 나이지만 같은 민족인데 그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아무리 말을 배우고 역사를 배우고 해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내 모국으로 가서 거기 공기를 마시고 물을 마시고 밥도 먹고 같은 세대 젊은이들하고 마음을 나누는 어떤 나라를 가꾸고 싶은가. 이상이 어떤가. 그런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심정이었죠.
◇ 정관용> 그래서 무작정 오신 거예요?
◆ 강종헌> 네. 그래서 나로서는 배우고 공부도 하면서 처음에는 역사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한국사, 동양사. 그래서 인문계로 진학하려고 했었는데 우리말 6개월 동안 배우면서 쭉 보니까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참 가난한 나라였잖아요. 그래서 저는 서울대병원 안에 있는 재일동포 학생들 기숙사가 있는데 거기에 두 달 정도 있었습니다.
◇ 정관용> 그때는 어학 공부하실 때?
◆ 강종헌> 네. 어학 공부할 때. 아침마다 학교를 가는데 아주 혈색이 별로 안 좋은 분들이 와서 줄을 서요. 뭔가 싶었는데 매혈해서.
◇ 정관용> 피를 파는?
◆ 강종헌> 피를 파는.
◇ 정관용> 서울대 병원에서도 피를 팔았군요.
◆ 강종헌> 네. 그래서 그런 걸 보고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되면 그래도 이 나라에서 어디를 가도 내가 작은 봉사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의대를 택했죠.
◇ 정관용> 그렇군요. 그러니까 전태일 열사 사건을 접하고 한국에 처음 오신 건 그러면 71년?
◆ 강종헌> 71년 4월 5일입니다.
◇ 정관용> 그때 처음 오셔서 학교에 입학하시게 된 건 그러면?
◆ 강종헌> 72년.
◇ 정관용> 72학번이시로구나. 그러다가 본과에 다니시던 75년에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 강종헌> 특별한 일은 없어요. 특별한 일은 없고 다만 서울대 의대 안에 그 당시 ‘사회의학연구회’라는 서클이 있었습니다.
◇ 정관용> 사회의학연구회.
◆ 강종헌> 네. 그저 그냥 의학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회봉사할 수 있는 의사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그런 학생들이 고민하는.
◇ 정관용> 의대생들 가운데에는 사회의식이 있는 삐딱한 학생들 모여 있는 그런 서클.
◆ 강종헌> 그래서 그 학생들 문제의식이라든가 그런 것이 굉장히 저는 공감이 갔어요. 그래서 함께 공부도 하고 그 모임에 가끔 나가기도 했는데 제가 무슨 주도급도 아니고.
◇ 정관용> 그 모임에서는 아마 좌파적인 책도 많이 읽고 그러셨겠죠?
◆ 강종헌> 그런 것도 있었죠. 진보적인 책도 구하고.
◇ 정관용> 그랬는데요?
◆ 강종헌> 그런데 75년이면 박정희 정권 말기에 들어가는데 긴급조치 9호 같은 시대인데.
◇ 정관용> 9호 시대죠.
◆ 강종헌> 그리고 또 75년 4월 30일에 베트남이 무력 통일되는 그런 날이었고.
◇ 정관용> 미군이 패퇴하는.
◆ 강종헌> 그런 것도 있고 해서 참 사회적으로는 정부로서는 굉장히 위기감도 있었고 학생들을 계속 몰아붙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분위기를 잡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공안사건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냥 공안사건이 아니라 북한하고 연계시키는.
◇ 정관용> 센 걸로.
◆ 강종헌> 센 걸로 해야 학생들이 조용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정관용> 그래서 먼저 터진 게 11월 22일 발표된, 이건 수사까지 다 끝나서 발표된 거죠.
◆ 강종헌> 그렇죠.
◇ 정관용> 중앙정보부에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이었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잡혀가셨다?
◆ 강종헌> 네.
◇ 정관용> 그 중앙정보부에 친구들, 그러니까 일본에서 같이 온 유학생들이 잡혀가고 이런 건 알고 계셨겠네?
◆ 강종헌> 네, 알고 있었죠. 굉장히 분위기가 아주 공포분위기였습니다.
◇ 정관용> 그랬겠죠. ‘나도 잡혀갈 수도 있겠다’ 혹시 그런 생각도 하셨어요, 그러면?
◆ 강종헌> 네, 그런 것도 생각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법을 어긴 것도 없을 것이고 일본에서도 물론 집 근처에 조총련 사람도 있고 선후배들 속에는 그런 사람도 있지만 내가 무슨 특별한 조직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당국에서 발표하는 것처럼 내가 임무를 부여받고 공작금 받고 그 사람들한테 보고하고 그런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일본에서는 그냥 자연스럽게 이웃끼리 오고 가고 대화를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거 가지고 처벌을 하겠는가. 그러니까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을 했었죠.
◇ 정관용> 뭔가 조금 미심쩍은 게 있었으면 아이고 나도 곧 오겠구나.
◆ 강종헌> 그런 각오도 했어야죠, 만약 있었다면.
◇ 정관용> 그런데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냥 계셨다?
◆ 강종헌> 네.
◇ 정관용> 그런데 어느 날 와서 체포해간 거예요?
◆ 강종헌> 네, 새벽에 와서 11·22사건으로 서울의대 선배가 거기에 들어갔었어요. 그 사람에 대해서 좀 알고 싶은 게 있으니까 잠깐만 좀 얘기를 해 달라고 왔었어요.
◇ 정관용> 그런데 그게 보안사령부였어요?
◆ 강종헌> 그때 저는 몰랐죠. 보안사령부가 있다는 것도.
◇ 정관용> 그런데 아무튼 와서 그 선배 얘기를 묻더라, 처음에는?
◆ 강종헌> 네.
◇ 정관용> 그래서요?
◆ 강종헌> 그래서 그냥 따라갔죠. 그랬더니 어디 남영동 쪽인가? 지리도 잘 몰라요. 거기에 민간 가옥인데 무슨 아지트인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런 데를 데려가서 막 수사를 시작했죠. 강압적인 고문수사가 시작된 겁니다.
◇ 정관용> 어떤 고문을 받으셨어요?
◆ 강종헌> 처음에는 잠을 안 재우고 그냥 며칠씩 마구잡이로 구타를 하죠. 구타를 하고 옷을 다 벗겨놓고. 기절하면 물 뿌려서 일어나게 하고 온몸이 시뻘겋게 멍이 들 정도로 맞았습니다. 그냥 ‘네가 언제 북에 갔다 왔느냐? 언제 포섭됐느냐? 있는 대로 다 써라’ 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기록을 계속 쓰라는 겁니다. 자서전 작성을 몇 차례씩 시켜요.
◇ 정관용> 태어나면서부터. 선배 얘기는 안 물어보고?
◆ 강종헌> 안 물어보고. 그래서 그 사람들 마음에 안 드는 내용이면 다시 쓰라고 하고. 결국은 다 갖춰놓은 시나리오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맞춰가면서 내가 거기에 응하지 않으면 또 물고문하고 또 전기고문도 하고.
◇ 정관용> 물고문, 전기고문까지.
◆ 강종헌> 네. 그건 기본입니다. 재일동포 학생들이 들어가면.
◇ 정관용> 이렇게 체포돼서 조사받고 있다는 걸 일본에 있는 부모님들은 아셨나요?
◆ 강종헌> 모릅니다.
◇ 정관용> 전혀 모르고?
◆ 강종헌> 모릅니다. 그리고 완전히 외부하고의 연계는 차단되고 고립무원 상태에서 원시적인 구타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고문의 강도가 강해지고 나중에 내가 다 포기하게끔 만들어요.
◇ 정관용> 모두 며칠이나 거기서 계셨어요?
◆ 강종헌> 한 50일 있었죠.
◇ 정관용> 아이고. 그래, 50일 지나니까 그들이 즉, 보안사령부가 요구하는 시나리오대로 쓰신 거예요?
◆ 강종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 정관용> 그 시나리오가 뭐였어요? 북한 갔다 왔다?
◆ 강종헌> 시나리오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근처에 있는 조총련계 사람하고 접촉하면서 포섭되었다.
◇ 정관용> 조총련계 사람에게 포섭.
◆ 강종헌> 그리고 유학생을 가장해서 한국에 들어가서 학생들 선동하고 비밀조직 만들고 그렇게 하라, 그런 임무였다. 그래서 방학 때는 집으로 돌아가니까 몇 년도에 방학 때 들어간 것을 이용해서 밀항선을 타고 북으로 갔다 왔다.
◇ 정관용> 북한까지 갔다 왔다?
◆ 강종헌> 네. 입당을 했다. 그런 내용입니다.
◇ 정관용> 그때는 간첩단이 아니고 혼자였습니까, 그러면? 강종헌 씨 혼자?
◆ 강종헌> 재일동포로서는 저 혼자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방이 여러 개 있지 않습니까? 서빙고 보안사령부 쪽으로 가면 내 위에도 몇 사람 재일동포 학생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건으로.
◇ 정관용> 별개 사건으로.
◆ 강종헌> 네, 별개 사건으로. 그런데 중앙정보부처럼 ‘일망타진’ 그렇게 발표하진 않았습니다.
◇ 정관용> 그러면 강종헌 씨와 관련된 한국 학생들도 포함이 돼 있었어요?
◆ 강종헌> 네. 그때 재일동포가 저 하나인데 ‘서울의대 간첩사건’ 해야 되니까 그 밑에 아까 있던 사회의학연구회 서클에 있던 학생들이 10명쯤 들어갔었죠.
◇ 정관용> 그러면 그 모임에는 수괴이시네, 그러니까.
◆ 강종헌> 저는 말단 옵서버 정도였는데 나를 수괴로 해야만 조직이 되는 것 아닙니까.
◇ 정관용> 그래야만 조총련계에 포섭돼서 북한과 연결되니까. 그리고 강종헌 씨를 통해 한국에 있는 학생들은 또 포섭된, 그런 식으로까지. 처음에 사형선고 받으셨죠?
◆ 강종헌> 네. 그 당시는 그러니까 저는 서울대 사건이고 고려대, 부산대 한국신학대. 몇 군데 사건을 만들어요.
◇ 정관용> 그게 다 재일동포간첩단 사건들이죠?
◆ 강종헌> 우리를 주범으로 해서. 그래서 주범은 거의 다 사형 받았습니다. 입국한 것으로, 입당한 것으로 만들고.
◇ 정관용> 정말 죽을 것으로 생각하셨나요?
◆ 강종헌> 처음에는 참 믿어지지 않죠. 사형이라는 것 자체가. 내가 뭘 했기에 사형까지 주나 했는데 항소심도 빨리 끝나고 1년 2개월 만에 대법원 재판까지 다 끝나고 아주 초고속으로 재판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사형 확정되니까 ‘이제 진짜 내가 사형수구나’ 하는 현실에 부닥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당시에는 내가 제일 어렸습니다, 나이가. 국가보안법 사형수 중에는 내가 제일 어렸는데, 그 외에 남쪽에서, 남한에서 무슨 사건으로 사형수가 된 사람도 있었고 또 북에서 파견되고 사형수가 된 사람도 있었고. 해마다 몇 명씩 사형집행을 합니다. 그런 걸 직접 눈앞에서 보는 겁니다. 인혁당 사건은 제가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것인데 울릉도간첩단사건. 세 분이 사형수였는데 그분들 가시는 것도 제가 봤고. 그런 거 보면, 어떻게 보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고양이 한 마리 잡아서 국민들한테는 무슨 호랑이라고 선전하는 꼴입니다. 가만히 그런데 가만 보니까 이제 내가 고양이로 잡혔지만 죽을 때는 호랑이로 죽을 수밖에 없는 거구나. 그렇게 스스로 납득을 시켰는데 그렇게 몇 분씩 집행되는 걸 보면 ‘이건 장난이 아니구나. 내가 마지막 각오는 하고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걸 매일 일어날 때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다졌었죠. 그렇지만 사람이라는 게 사형의 두려움으로부터는 해방이 안 되는 겁니다. 이겨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사형이라는 공포에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면 쓸수록 더 공포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하루는 81년도쯤 될까요? 제가 사형 집행된다는 착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보통 오전에 해요, 호출을. 그런데 그때는 운동을 안 시킵니다. 그래서 아무도 밖에 못 나가게 하고 담당 교도관은 늘 보니까 그 사람도 시키지 않아요, 호출할 때는. 다른 교도관을 시켜서 ‘누구누구 면회, 누구는 교무과’ 그런 식으로 해서 데려가요. 그래서 그때가 81년 12월이었던가. 그 전날에 사형집행이 있었어요. 그래서 ‘아, 이제 올해는 어떻게든지 넘겼구나’ 했는데 그 다음 날 바로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 정관용> 운동 안 시키고.
◆ 강종헌> 네, 운동 안 시키고.
◇ 정관용> 누가 부르러 왔어요?
◆ 강종헌> 네. 시추에이션이 바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아차 했죠.
◇ 정관용> 죽는구나.
◆ 강종헌> 네. 그래서 그때까지 제가 죄지은 건 없으니까 부끄러운 것 없다. 당당하게 마지막 가겠다. 그런 마음을 먹고 있는데 통하지 않아요. 일단 막상 그런 경우에 놓이니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심장이 막 뛰고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나요. 그런데 나중에 이게 호출돼 가면서 사형집행장이 아니라 교무과로 갔으니까 ‘아, 아니었구나’ 하고 하는데 그 추운 겨울에 제가 땀을 쭉 흘리는 거예요. 아, 너도 별수 없는 놈이구나. 사형 두려운 건 인간이니까 당연한 거다. 그러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면 죽음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죽음을 수용해야 된다. 받아들여야 한다.
◇ 정관용> 아유, 불가능하죠.
◆ 강종헌> 그래서 책을 보고 있으면 조용히 책을 접고 그냥 따라가면 된다. 그런 마음을 가졌어요. 그래서 정치범이다, 사상범이다, 그런 쓸데없는 교만심은 버려야 된다. 한 인간으로서 평범하게 죽음의 순간이 오면 그걸 받아들이고 가겠다. 그런 마음을 먹으니까 조금 마음이 편해졌어요.
◇ 정관용> 그래서 아무튼 감형을 받으시고 13년 복역하시고 88년에 가석방. 그 가석방은 또 어떻게 해줬대요?
◆ 강종헌> 그때가...
◇ 정관용> 87년 민주항쟁 이후 시대적 변화로 인해서죠?
◆ 강종헌> 네. 그 영향인데 조금씩 사면을 해서 석가탄신일 때, 8.15 때, 개천절 때 그렇게 해서 조금씩 나왔습니다. 88년은 올림픽 때였으니까 마지막에 막차로 제가 나왔습니다.
◇ 정관용> 2010년에 재심 신청하시고 지난 8월에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그렇죠? 75년에 여러 사건으로 잡혀가신 재일동포 가운데 사형이 직접 집행되신 분들도 있죠?
◆ 강종헌> 사형 집행된 사람은 다행히 없습니다. 아마 구명운동 덕분일 겁니다, 일본에서.
◇ 정관용> 여러 사건은 있었지만 사형집행은 없었고. 대체로 그러면 감형돼서 다들 석방되셨고. 그렇죠?
◆ 강종헌> 석방되었습니다.
◇ 정관용> 지금 재심 신청해서 무죄 받으신 분이 모두 몇 명이죠?
◆ 강종헌> 무죄 확정된 사람이 스물일곱인가 스물여덟인가 될 것입니다.
◇ 정관용> 지금 차근차근 재심하고 계신 분들이 계시고.
◆ 강종헌> 네. 숫자가 정확하지 않아요. 스물네 명, 다섯 명. 서른 명 가까이 됩니다.
◇ 정관용> 뭐 좋습니다. 그날 그 사건만 없었다면 의사가 되셔서 봉사활동도 하셨겠습니다만 또 돈도 꽤 버시고. 잘 사셨을 텐데, 88년 석방되시고 일본 가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 강종헌> 일본 돌아가서는 의학을 계속 할 수는 없었으니까 먹고 살아야 되는데 그것보다도 저는 제 모국하고의 인연을 끊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 정관용> 지긋지긋했을 텐데, 그 인연이.
◆ 강종헌> 아니에요. 그래도 내 청춘이 내 감옥에 묻혀 있고 내 조국에 있는 거니까 그 체험을 살려서 한국문제연구소라고 작은 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친구들하고. 그래서 다달이 우리나라 정세 자료내고 요청 있으면 강연도 하고 원고도 쓰고 그렇게 해서 살았는데 2000년 6월에 남북정상회담이 있어서 남북관계가 극적으로 전환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걸 미리 예측을 하지 못했던 제 자신이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국제정치를 체계적으로 배워야 되겠다, 그런 마음으로 대학원에 들어갔었죠. 그래서 51살에 대학원에 들어가서 56살인가 때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 몇 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참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버리신 것 아닙니까.
◆ 강종헌> 네, 물론 의사가 돼서 봉사하는 것도 한 길이고. 그러나 남들이 하지 못한 체험을 통해서 나는 그렇게 알고 싶었던 조국을 더 깊이 알고 이해하고 배운 것이 결코 헛된 세월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 정관용> 아휴.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제가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죄송합니다. 진짜.
◆ 강종헌> 아닙니다.
◇ 정관용> 한 분의 인생을, 한 분뿐이 아니죠, 그 당시에. 재일동포 분들 우리가 앞에 잠깐 소개했습니다만 그 당시에 일본사회 내에 조총련, 민단 이렇게 나뉘어 있던 그런 것 때문에 유신정권은 간첩단 사건을 만들기에 아마 제일 좋은 소재들이었을 거예요.
◆ 강종헌> 제일 좋은 소재였고.
◇ 정관용> 그러니까 마구잡이로 이런 저런 사건을 많이 만들었고 거기에 희생되셨던 그런 건데. 오늘 벌써 40년이 흘러서 서울에서 토론회 참석차 어제 오셨다고 제가 들었습니다. 이 토론회의 취지는 무엇이었는지 짧게 한 말씀만 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