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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할아버지 재벌, 아버지 재벌, 아들 재벌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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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할아버지 재벌, 아버지 재벌, 아들 재벌의 나라

    위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두 사람의 거인(巨人)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강원도 산골마을 통천에서 소를 판 돈을 들고 서울로 나와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약관(弱冠)의 20살 때였다. 그곳에서 번 돈으로 자동차 수리공장을 창업했다. 그리고 토건업에 도전하면서 기업인의 야망을 키워나갔다. 산전수전 겪어본 청년답게 용기와 도전 정신으로 부의 신화를 일구어내기 시작해 조선, 자동차, 건설의 제국 '현대'라는 글로벌 기업집단을 만들어냈다.

    이병철 전 '삼성그룹' 명예회장은 경남 의령에서 부모에게 장사 밑천을 받아 대구로 나와 '삼성상회' 간판을 걸고 청과류와 어물을 팔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29살 때였다. 열정과 지혜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해 물산에서 제당 그리고 모직과 비료, 전자, 석유화학으로 확장해 '삼성'이라는 대한민국 부동의 1등 기업을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불굴의 신화를 창조했던 재벌 1세들이 세상을 떠나자 자식들이 부를 상속받았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나 전통적으로 부의 대물림이 통용돼 온 나라였기 때문에 상속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라든지 반감이 적었다. 한 집안에서 부모가 사망하면 장남이 재산을 물러 받았던 것처럼. 그러는 사이 세상은 바뀌었고, 부의 재분배에 대한 해석도 달라졌고,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공존방식도 재정립됐다. 유독 꿈적하지 않고 버티는 곳은 대한민국의 상속재벌들이다.

    4일 블룸버그가 내놓은 2015년 말 기준 세계 억만장자 자료를 보면 대한민국 재벌 2·3세대들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세계 재벌 400위 안에 든 한국 갑부는 이건희, 서경배, 이재용, 정몽구, 최태원 5명. 이들 모두가 아버지로부터 기업을 물러 받은 '상속자'로 분류됐다. 그러나 미국은 400위 안에 든 125명의 재벌 가운데 71%에 달하는 89명이 '자수성가'로 나타났다. 그 중 상위 10위에 든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워런 버핏, 래리 페이지 등은 모두 자수성가한 재벌들이었다. 중국은 재벌 29명 중 1명만 빼고 모두 '창업자'였고 일본 역시 순위에 든 5명 모두가 '창업자'였다.

    한국 재벌가의 운명이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상속재벌들은 할아버지나 아버지보다 월등히 뛰어난 경영으로 급변하는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그래보이지가 않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구멍가게로 시작해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었지만 2·3세대 손자재벌들은 역부족이다. 그룹경영이 불안하고 도전과 개척정신은 희미하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는 데 급급해 보인다. 숨 막히는 글로벌 세계시장에 새 제품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배짱도 없다. 손쉬운 동네 골목시장을 탐낸다. 서민들이 먹고살아야 할 고만고만한 품목까지도 문어발식으로 잡아들여 코 묻은 돈까지 거두려고 한다. 막대한 경제력을 오남용해 시장을 독과점한다.

    우리나라 2·3세대 상속재벌 총수들이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것이 그 정도라는 얘기다. 그러다보니 기업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성장 사다리가 막혔다는 분석이다. 그뿐인가. 자본이 대기업 집단에 몰려 있다 보니 틀에 박힌 자본시장이 형성돼 새로운 기업이 진입하거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차단돼 있다. 설령 한 창업자가 각고의 노력 끝에 신생기업을 만들기라도 하면 재벌은 눈독을 들이다가 사냥에 나선다.

    상도의도, 양심도 없어 보인다. '본 바' 없이 자라다보니 노동자들과 이웃의 딱한 사정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본 것은 태어나서부터 풍요였고 어른이 되기까지 엘리트였다. 땀 흘려 일해 본 적도 없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열댓 장의 이력서를 써본 일도 없다. 내 집 마련을 위해 은행창구에 서서 대출서류에 도장을 찍은 경험도 없다.

    부모가 정해준 코스대로 유학을 다녀왔고, 아버지의 기업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다가 임원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무엇보다 가난을 모르고 성장했다. 동시대 젊은이들이 고뇌했던 독재라든지 민주화를 위한 지난한 여정들도 어깨 너머로만 보았을 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피땀으로 일군 값진 재화는 존경을 받았지만, 부의 상속으로 갑부가 된 재벌 2·3세대들은 선친보다 서너 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존경받기 어렵다. 오히려 변혁이라는 거친 바람을 불러온다. 그 안에 얼어붙은 땅을 뚫고 솟아올라오는 싹, 혁명의 싹이 움트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다. {RELNEWS:right}

    시민들은 난공불락처럼 솟아있는 상속재벌들의 높은 빌딩을 올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저 성(城)만 무너지면 갑과 을이라는 차별과 냉대도 사라지고, 새로운 창업을 할 수 있고, 골목에서 빵을 팔면서도 행복한 저녁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다만, 아직 때가 아닐 뿐이라는 불순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열배가 많으면 헐뜯고, 백배가 많으면 두려워하고, 천배가 많으면 그의 일을 하고, 만 배가 많으면 그의 하인이 되는데 이것이 사물의 이치다"고 말한 사람은 사마천이다. 그는 돈이 없어 치욕적인 '궁형'을 받아야만 했던 슬픈 사람이다. 울분과 고통 속에 써내려간 글이 '사기'다. 그가 '사기' 맨 마지막 장에 붙인 '화식열전'(貨殖列傳)이 부와 돈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재산이 만 배나 많으면서 '착취'까지 하면 주인을 향해 이를 드러내는 법"인데, 생각 깊은 사마천은 차마 그 이야기를 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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