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설' 풍속도 세월과 함께 변한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마다 윷판이 벌어졌고 장정들은 꽹과리와 징, 장구, 북을 치면서 마을을 돌았다. 머리에 눌러 쓴 상모(象毛) 꼬리를 길게 흔들며 흥을 돋우면 뒤따르던 꼬마들이 박자에 맞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여자들의 널뛰기가 한창인 공터에서는 연신 웃음보따리가 터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설날은 전통적인 놀이문화와 어우러졌고 흥이 있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전통적인 설 풍속이 급속하게 퇴색한다. 젊은이들에게 윷판과 널뛰기는 더 이상 흥을 돋우는 놀이가 아니다. 오히려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노래방이 설 놀이로 편입됐다. 차례를 지내고 세배와 성묘를 마친 가족들은 윷판 대신 노래방으로 몰려갔다. 반주에 맞춰 흥에 겨운 노래를 몇 시간씩 돌아가면서 불렀다. 저마다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을 뽐냈다. 손자부터 할아버지까지 노래 삼매경에 빠졌다.
노래방 붐이 시들해지면서 영화관과 카페로 옮겨간다. 복합영상관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면서 설 연휴 기간 동안 영화관을 찾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그런가 하면 가족끼리 혹은 친구끼리 대형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설 연휴 기간을 휴양지에서 보내며 휴식을 즐기는 가족들도 급증하고 있다. 설날 전통적인 놀이문화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문제는 자라나는 신세대들에게는 설날 놀이문화뿐 아니라 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까지도 퇴색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동차와 KTX를 이용하면 전국 어디든 2~3시간이면 갈 수 있는 시대에 고향을 찾는 일은 큰 의미가 없다. 신세대들에게는 설날 하루 부모 형제와의 1박 2일 동거도 불편하다. 언제든지 통화할 수 있고 영상으로 얼굴을 볼 수 있는 부모와 하룻밤을 같이 자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생겨나지 않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DNA 속에 귀소본능이 살아남아 있는 세대는 이제 40대 이후 정도다.
신세대들에게는 설이라는 명절을 이해하는 사고방식이 바뀔지도 모른다. 조상, 부모형제, 고향 등으로 압축되는 설의 의미가 사라질 가능성도 높다. 1,500년의 장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설날이지만, 시대의 흐름과 과학문명이 발달, 개인중심의 사회구조, 가족공동체의 해체로 인한 변화는 막을 방법이 없다.
'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신세대들의 변화에 맞게 풍속을 바꿔야 한다. 설날의 전통문화와 관습을 고집하고 옛것 그대로만 지키라고 하면, 우리의 후대들이 언젠가는 설이라는 명절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 '설' 대신 21세기 새로운 문화와 패러다임에 맞는 휴일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5월이면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한민족의 최대 명절이었던 ‘단오절’이 현대에 와서는 이름만 전해지는 것이 좋은 예다. 100년 뒤에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 즐기던 ‘설’ 명절 대신 태양력 중심의 새롭고 멋진 명절이 탄생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