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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서 장사하다 귀농, 가난하지만 행복합니다"

사회 일반

    "뉴욕서 장사하다 귀농, 가난하지만 행복합니다"

    - 자식에게 농촌을 고향으로 만들어주고 싶어 귀농
    - 농사 시작후엔 빚도 많이 늘어났지만
    - 자식들과 감자캐고 복숭아 따며 살아서 행복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20:00)
    ■ 방송일 : 2016년 4월 26일 (화) 오후 7시 5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최용탁(농부 소설가)

     



    ◇ 정관용> 오늘 스튜디오에 좀 특별한 분, 귀한 손님 한 분 모셨습니다. 소설도 쓰고 산문도 쓰시는 그리고 농사꾼이세요. 과수 농사를 하시는 분인데요. 이번에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 이런 제목의 산문집을 펴내서 많은 분들의 주목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스튜디오에 초대했습니다. 최용탁 선생님이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 최용탁> 네, 반갑습니다.

    ◇ 정관용> 귀농하신 지가 몇 년이라고요?

    ◆ 최용탁> 올해 21년째 됐습니다.

    ◇ 정관용> 21년. 이번에 제가 방금 소개한 책에 글쓴이의 말 서문을 보면 ‘귀농한 후 낳은 자식들 셋이 다 자랐고 복숭아나무는 늙어 스스로 쓰러지기도 하는 세월이었건만 돌이켜보면 아득하기만 하다. 무슨 성취를 바라 힘을 쏟지 않았으니까 눈에 띄는 무언가가 남아 있을 리 없다. 다만 어쩌다 글을 쓰는 자가 되어 세상 귀퉁이 지면에 별 뜻 없는 흔적을 남기고 말았으니 이는 두고두고 두려운 일이다’ 이렇게 쓰셨어요. 제가 이 문장을 읽고 감동을 했습니다, 사실.

    ◆ 최용탁> 아이고.

    ◇ 정관용> 귀농을 왜 하셨어요?

    ◆ 최용탁> 그러게요. (웃음) 글쎄, 귀농을 한 이유는 우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시골에서 태어나서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 정관용> 고향이 어디세요?

    ◆ 최용탁> 고향은 충북 충주입니다.

    ◇ 정관용> 지금 사시는 데가 충주고?

    ◆ 최용탁> 아, 지금도 충주에 살지만 원래 고향은 충주 때문에 수몰이 됐어요. 수몰이 돼서 떠났다가. 그러니까 31살까지 외지를 떠돈 거죠. 물론 가족과 같이 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마는. 그러다가 30살에 결혼을 하면서 제 아이들한테 고향을 남겨주고 싶다. 그런데 고향이라면 저는 제가 태어났던 그 고향이 항상 떠오르기 때문에 도시를 고향으로 둔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자식들을 농촌을 고향으로 삼아줘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가장 컸어요.

    ◇ 정관용> 도시생활이 좀 힘드셨어요?

    ◆ 최용탁> 네, 장사도 하고 그랬었거든요. 그런데 저한테 잘 맞지도 않고 너무 힘들더라고요. 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어요.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결혼을 하면서 마음을 아주 굳혔죠. 다행히 제 처도 따라주고 해서 첫 아이가 생기고 바로 준비를 해서 귀농을 하게 됐습니다.

    ◇ 정관용> 30대 초반 결혼 그 직전까지 가졌던 직업은 어떤 겁니까, 주로?

    ◆ 최용탁> 실은 제가 뉴욕에 살다가 바로 충주로 귀농을 했는데요.

    ◇ 정관용> 아, 뉴욕에서 충주로?

    ◆ 최용탁> 네.

    ◇ 정관용> 서울에서 충주로나 대전에서 충주로가 아니고?

    ◆ 최용탁> 어떻게 그렇게 살다 보니까 뉴욕에서...

    ◇ 정관용> 뉴욕은 왜 가셨는데요?

    ◆ 최용탁> 22살 겨울에 Queens College란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좀 하다가.

    ◇ 정관용> 이민이에요? 유학이에요?

    ◆ 최용탁> 처음에는 이민으로 갔었어요. 이민으로 갔다가 학교를 좀 다니다가 물론 같이 생활을 해야 하니까 장사를 같이 했어요. 장사를 같이 하고 학교도 다니고 또 그러다가 또 어떤 사회단체에 가입을 하게 돼서 활동을 했었는데.

    ◇ 정관용> 어떤 사회단체요?

    ◆ 최용탁> 그게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다마는 그때 우리나라에서 이적단체로 규정했던 한국청년연합이라는, 아마 임수경 의원이 방북에 관련되고 그랬던 단체였는데. 그런 데 활동도 하고 이러다가 나중에 93년도에 그 이적단체가 풀렸어요. 풀리자마자 들어와서 결혼하고 그리고 나서 95년도에 아주 귀농을 한 겁니다, 충주로.

    ◇ 정관용> 그 이역만리 미국 땅 뉴욕에서 팍팍한 삶 또 게다가 정치적으로 얽혀 있는 그런 삶을 사시다가 ‘아이고, 고향 가자’

    ◆ 최용탁> 네, 맞습니다.

    ◇ 정관용> 그래도 누구나 다 도시로, 도시로. 심지어는 미국으로. 더 밝은 미래, 이렇게 하는데 생각이 거꾸로 가신 거예요?

    ◆ 최용탁> 글쎄요. 미국 갈 때는 제가 나이도 어렸고 아마 원래 고향이 수몰되는 바람에 굉장히 뿌리 뽑혔다는 의식이 강했었어요.

    ◇ 정관용> 아, 아픔.

    ◆ 최용탁> 그래서 이제 어딜 가도 고향이 아니구나. 어딜 가도 내가 발 붙이고 살, 정 붙이고 살만한 데가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강했었는데요. 결혼하면서 그리고 나이가 30살 되면서 ‘아, 반드시 내가 태어났던 고향이 아니라도 흙을 밟을 수 있고 그렇게 무언가를 내손으로 키우면서 사는 삶이 나한테 맞겠다. 내 아이들에게도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 정관용> 귀농하셔서 첫 해부터 농사가 잘됐습니까?

    ◆ 최용탁> 뭐 그럴 리가 없죠.

    ◇ 정관용> 잘됐을 리가 없죠. 어떻게 사셨어요?

    ◆ 최용탁> 실은 미국에서 장사를 하고 이러면서 장사가 의외로 잘 되는 바람에, 저한테 적성에는 안 맞았지만 장사가 잘되는 바람에.

    ◇ 정관용> 돈을 좀 버셨군요?

    ◆ 최용탁> 꽤 모았었어요.

    ◇ 정관용>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계속 장소하려고 할 텐데 아무튼.

    ◆ 최용탁> 적당히 한 5년 정도, 땅을 장만하고 5년 정도 까먹을 수 있겠다 싶은 돈이 모였을 때 그냥 귀농을 결정한 것입니다.

    ◇ 정관용> 그래서 땅 사시고. 그리고 까먹기 시작한 겁니까? (웃음)

    ◆ 최용탁> 네. 그렇습니다.

    ◇ 정관용> 어떤 농사를 어떻게 하셨어요?

    ◆ 최용탁> 처음에는 포도랑 배를 심었었는데요. 제가 귀농한 지역이 포도랑은 전혀 토질이 맞지 않아서 한 4년 만에 포도나무 다 캐내고 다시 사과로 바꾸고. 배는 너무 가격이 폭락을 해서요. 도저히 생산비도 안 나와서 계속 할 수가 없어요. 배농사도 한 10년 정도 하다가 이제 사과로 바꾸고 그런 식으로 해서 지금은 사과랑 복숭아를 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사과하고 복숭아.

    ◆ 최용탁> 네.

    ◇ 정관용> 지금 이맘때면 사과, 복숭아나무가 모양이 어떻습니까? 꽃이 펴 있나요?

    ◆ 최용탁> 꽃이 활짝 폈다가 지금 한창 지는 중입니다. 복숭아꽃은 많이 졌고. 사과꽃은 아직 하얗게 남아 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 정관용> 한참 예뻤겠네요.

    ◆ 최용탁> 네, 그렇죠.

    ◇ 정관용> 농장 분위기가.

    ◆ 최용탁> 요즘은 그렇게 글 쓰는 친구들이나 이런 친구들이 꽃 보러 자주 놀러오기도 하고 그럽니다.

    ◇ 정관용> 몇 년쯤 지나서부터 그래도 먹고 사실 만하게 농사가 된 것입니까?

    ◆ 최용탁> 글쎄요. 농사 자체만 가지고 수지타산을 따질 수는 거의 없고요. 일곱 식구가 쓰는 생활비 이런 걸 생각하면 단 한 해도 빚이 늘지 않은 해가 없었죠.

    ◇ 정관용> (웃음) 그래요?

    ◆ 최용탁> 네.

    ◇ 정관용> 일곱 식구라면 두 분 부부에다가 자녀가.

    ◆ 최용탁> 자녀가 셋입니다. 부모님 계시고.

     



    ◇ 정관용> 부모님 계시고. 계속 빚이 쌓이면 어떻게 살아요?

    ◆ 최용탁> 다행히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좀 글 써서 들어오는 수입이 있고.

    ◇ 정관용> 부가수입으로?

    ◆ 최용탁> 네. 실제로 우리나라 농민들이 부가수입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가구가 대다수.

    ◇ 정관용> 잘못 모신 것 아닌가 모르겠네요. 귀농 21년차 분 모셔서 ‘아, 귀농해서 이렇게 살만 합니다. 성공했습니다’ 이런 얘기를 방송에 보내드려야 많은 분들이 ‘나도 한번 돌아가볼까’ 이런 생각 하실 텐데 지금 이거 가지 말라는 얘기 아닙니까? (웃음)

    ◆ 최용탁> 저는 귀농현상에 대해서 굉장히 반갑게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데요. 귀농하시는 분들이 전부 무슨 농촌에서 부를 일구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신 분도 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귀농하시는 분들을 제가 고마워하고 존중하는 게 이분들은 그래도 이 세상을 좀 더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거나 혹은 보다 더 인간다운 삶을 꿈꾸거나 이렇다고 믿기 때문에.

    ◇ 정관용> 그렇죠. 아니, 귀농하면서 ‘내가 거부 한번 돼 보겠어’ 이런 사람 누가 있겠어요? 그러나 그래도 기본적인 생존은 계속 가야 되니까 삶의 방식을 바꿔보겠다는 선택이 귀농의 가장 첫 출발이겠죠.

    ◆ 최용탁> 그렇죠.

    ◇ 정관용> 그리고 방금 제가 인용한 것처럼 특히 우리 최 선생님 같으신 분들은 ‘무슨 성취를 바라 힘을 쏟지 않았으니까 눈에 띄는 무언가가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러니까 돈 좀 많이 벌어야지 이런 생각이 별로 없으셨다는 거잖아요. 애초부터.

    ◆ 최용탁> 전혀 없었죠, 그런 생각은 사실은.

    ◇ 정관용> 행복은 하셨습니까, 지난 20년?

    ◆ 최용탁> 저는 굉장히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 정관용> 뭐가 제일 행복하셨어요?

    ◆ 최용탁>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같이 아이들하고 감자 캐고 복숭아 따고 이랬던 게 제일 기억에 많이 남고요. 그래서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지금 거의 다 셋 다 키웠다고 할 수 있는데. 아이들이 그래도 건강하게 자라고 저희 부부의 삶을, 가난한 부모의 삶을 이해하고 또.

    ◇ 정관용> 존중하고.

    ◆ 최용탁> 네.

    ◇ 정관용> 지금 몇 살, 몇 살입니까, 아이들이?

    ◆ 최용탁> 지금 위로 딸 둘은 연년생이라 대학교 3학년, 2학년 그렇고요. 막내는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아들은.

    ◇ 정관용> 고등학교까지 그럼 다 충주 거기에서 다녔던 거예요?

    ◆ 최용탁> 네.

    ◇ 정관용> 그럼 위에 대학 간 둘은 지금 어디 가서 어떻게 삽니까?

    ◆ 최용탁> 둘 다 지금 외지, 큰 애는 서울, 작은 애는 대전에서 자취하고 삽니다.

    ◇ 정관용> 자취하면서 대학 다니고. 그런데 고등학교까지는 아무튼.

    ◆ 최용탁> 충주에서 다니고요.

    ◇ 정관용> 부모님 옆에서. 그 아이들한테 이제 부모님의 삶이 그래도 좀 좋게 보이고 존중해 주고 이런 게 제일 뿌듯하다. 방금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런데 이번에 책을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라는. 아들이 들으면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내셨습니다. 아들이 막내인데 어떤 질문입니까, 이 질문이?

    ◆ 최용탁> 그 책 본문에도 이 얘기가 잠깐 나와 있는데요. 아들이 가끔 와서 일을 도와주긴 하는데요. 하루는 와서 거의 하루 종일, 하루 종일도 아니고 한나절 정도 일을 도와주고 굉장히 뿌듯해 하더라고요. 원래 농사일이라는 게 하고 나면,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지만 성취감 같은 것이 있거든요. 그러더니 아주 땀을 닦으면서 농담처럼 ‘아빠 나도 커서 나중에 농사짓고 살까?’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게 됐어요. 아. 내가 농사짓는 것을 보면서 아들이 나도 농사짓고 살까? 하고 물었던 것이 이게 농사를 지어서 돈을 벌고 이러는 것도 있지만 내가 생각했던 어떤 보다 인간적인 삶.

    ◇ 정관용> 삶의 방식.

    ◆ 최용탁> 삶의 방식, 삶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을 아들이 가졌으면 좋겠다. 비록 돈이 되거나 출세나 무슨 명예나 이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길이라도 그런 자세나 태도를 가지고 사는 게 보다 인간으로서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붙였습니다.

    ◇ 정관용> 도시에서는 도저히 그런 방식의 삶이 안 되나요?

    ◆ 최용탁> 당연히 그렇게 훌륭한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이 또 도시에 굉장히 많겠죠. 그것은 누구나 다르지만 저는, 저 같은 경우는 안 되더라고요. 아마 제 아들도 그런 걸 보고 자라서 저는 제 아들이 농사를 짓고 살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생각을 합니다.

    ◇ 정관용> 그래서 흐뭇해하시는.

    ◆ 최용탁> 네. 그렇습니다. (웃음)

    ◇ 정관용> 농촌인구는 지금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난해 전체 인구의 5.1%.

    ◆ 최용탁>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죠. 그래서 앞으로 줄어드는 상황은 점점 진행될 것 같고요. 아마 어떤 농촌을 다시 기획하고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촌을 다시 새로 기획을 하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한 지경에 처할 것이다라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 정관용> 미국, 유럽, 일본 할 것 없이 세계적인 강국들 가운데 농촌대국이 아닌 나라가 없습니다.

    ◆ 최용탁> 그렇죠.

    ◇ 정관용> 사실. 농업대국이 아닌 나라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 최용탁> 그렇죠. 그 농업강국인 나라들이 수출을 하는 그 농산물 수출에 우리나라가 하위 수입국으로 전락해버린 거죠. 실제로 농산물 자급률이 20% 정도밖에 안 되니까요.

    ◇ 정관용> 우리도 진짜 소위 말하는 선진국, 선진국 얘기하려면 농촌부터 제대로 좀, 아까 말씀하신대로 재디자인해 놓고 보자.

    ◆ 최용탁> 네,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참 어렵죠? 수십조, 수백조를 쏟아 부어도 어렵죠?

    ◆ 최용탁> 네, 그것도 참 제대로 어떻게 쓰이는 문제나 이런 것, 이번에 이런 얘기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에 국회의원 비례로 되신, 야당에서 비례로 되신 김현권 당선자 같으신 분이 굉장히 농업 예산을 어떻게 써야 되는가에 대해서 굉장히 다른, 기존의 농정과 완전히 다른 생각을 많이 가지고 계신 분이거든요. 이번 선거를 통해서 그런 분들이 당선돼서 약간 그런 기대를 또 가지고 있긴 합니다.

    ◇ 정관용> 알겠습니다. 어쩌다 글을 쓰는 자가 되셨습니까?

    ◆ 최용탁> 원래는 시를 대학까지 시를 썼었어요. 시를 썼는데 시적인 재능은 모자라서 시인으로는 되지 못하고 이렇게 소설을 쓰게 됐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산문 이런 거.

    ◆ 최용탁> 네.

    ◇ 정관용> 그렇게 ‘어쩌다 글 쓰는 자가 되어 이렇게 별 뜻 없는 흔적을 남기고 말았으니 두고두고 두려운 일이다’라고 하셨는데 두렵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 최용탁> 아휴.

    ◇ 정관용> 제가 이 산문을 한 편, 한 편 읽으니까 그냥 마음이 편해지는 참 좋은 글들이더라고요.

    ◆ 최용탁> 아이고, 고맙습니다.

    ◇ 정관용> 오늘 농부소설가 최용탁 씨 만났습니다. 이분의 삶 또 이분의 글, 이분의 이야기들.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 이렇게 물었는데요. 청취자 여러분한테 아마 ‘당신은 어떻게 살 겁니까?’ 이렇게 묻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최용탁> 네, 감사합니다.

    ◇ 정관용> 최용탁 씨였습니다.{RELNEWS: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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