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일째 고공농성 중인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노조원 최정명(왼쪽)씨와 한규협씨 (사진=한규협씨 제공)
"봄이 오고 꽃이 피면 돌아갈게"
지난해 최정명(47)씨는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딸에게 그렇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채 5월 1일 노동자의 말을 맞게 됐다.
하얀 벚꽃잎이 가신 자리에 푸른 잎이 돋았고, 개나리와 진달래 꽃잎도 이미 땅에 떨어진 28일 서 있는 곳은 따뜻한 안방이 아닌, 75m 상공 철탑 위다.
농성 323일째.
살에는 칼바람이 몰아쳤던 겨울까지 버텨낸 두 사람이지만, 황사와 미세먼지의 공습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최씨는 "최근 고혈압 증세까지 생겼다"고 말하고, "당 수치가 올라가 합병증이 우려된다고 의료진이 말하더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생사를 건 고공농성 중이어도, 생각만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가족들이 이들에게도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딸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최씨는 "아직 딸이 숫자 개념이 없어 다행"이라며 "'언제 오느냐"는 딸에게 아직은 '열밤만 자면 간다'고 달랠 수 있다"며 안도했다.
최씨의 딸은 아직도 아빠가 일 때문에 집으로 못 돌아오는 줄 안다.
늦둥이 딸(6)을 본 한씨도 '딸바보'이기는 마찬가지.
"딸이 엄마한테 '아빠는 지구를 떠났다'고 하더라"면서 "엄마는 원래 잔소리쟁이였고, 나는 딸이 하자는 것은 다 해주는 아빠였는데..."라고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최씨는 아내에게 면목이 없다며 말을 이었다.
"수입이 완전히 끊긴 이후로 빚을 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하나 남은 승용차마저 처분해야 할 상황인 거죠. 아내가 이 상황을 이해해주는데,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하죠."
◇ 하늘에서, 땅속에서 잊히는 노동자들…"절박한 심정으로 올랐다"서울 한복판(서울 중구 舊인권위 건물) 광고판에 내걸린 '기아차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몽구가 책임져라!'는 현수막은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됐다.
잊혀져가는 현실과 눈을 흘기는 이들에게 최씨와 한씨는 "모두의 생각이 다른 만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사측과의 협상, 법원의 판단, 집회, 시위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며 "절박한 심정으로 올라온 이곳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9월 법원은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 468명이 기아차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주며 불법파견 노동자의 직접 고용을 사측에 통보했지만, 사측은 항소심을 준비하며 불법파견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최씨와 한씨가 하늘에서 몸부림 치고 있다면, 땅속에서 농성에 돌입한 이들도 있다.
5678서울도시철도 노동조합은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지하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김구연 기자)
지난 8일 기관사 한광호씨가 공황장애로 목숨을 끊으면서 노조원들이 근무환경 개선에 적극 나서기로 한 것이다.
김태훈 승무본부장은 "그동안 전동차 2인 승무를 꾸준히 주장해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수시간씩 어두운 터널을 기관사 혼자 운전하면서 안내방송과 출입문 관리, 민원 처리 등 강도 높은 업무를 수행하다보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전했다.
◇ 서울에만 농성장 12곳..."제도 안에서 노사갈등 해결 안돼"
서울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서울 시내에서만 농성중인 노동자들은 71명, 농성 현장은 12곳에 이른다.
한국교육기술대학 고용노동연수원 안정화 교수는 "노사간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시스템이 결여돼 있다"고 잘라 말했다.{RELNEWS:right}
그는 "노동자들이 제도적 틀 안에서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부족하다"면서 "각 노동계급을 대변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고려대 행정학과 정해일 교수도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이 주목받을 수 있는 사실상의 유일한 방법이 농성"이라며 "사법적 수단 등 여러 소통방식이 부족할 때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노동자들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충분히 호소할 수 있는 창구가 만들어진다면, 극단적 방식의 노동쟁의가 줄어들 것"이라며 "상대적으로 열세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이해가 충분히 대변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