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도 못 먹고 일에 쫓겨 혼자 일하다 사고를 당한 김 군, 그런가하면 김 군의 아버지뻘인 건설노동자들은 지하에 가득찬 가스가 폭발해 목숨을 잃는다. 안전보건공단 통계에 따르면 오늘도 일터에서는 하루에 평균 대여섯명 꼴로 사망사고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산재사망사고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CBS는 기획시리즈를 통해 5차례에 걸쳐 과거의 산재사망사고를 되짚어보고 그 사고를 촉발한 원인을 찾아본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 |
①'빨리빨리'만 없었어도…목숨걸고 달렸던 18살 배달알바 (계속) |
노컷뉴스 자료사진
◇ 저녁 6시 30분, 서울 영등포 문래동 네거리. 신호등이 노란불에서 빨간불로 바뀌던 찰나, 퇴근길 직장인들을 가득 태운 시내버스 기사 A씨는 버스의 가속페달을 밟았다. 곧 속도계기판 바늘이 시속 60km를 넘기면서 네거리로 진입했다.
순간 막 좌회전하며 튀어나오는 오토바이가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브레이크 페달을 힘껏 밟았다. 버스 손님 십수명이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버스 전면유리 건너편으로 작은 오토바이 한 대가 튕겨나가 방향지시등을 깜빡이며 널부러져 있었다. 피자배달 오토바이였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가던 김모군은 버스에 부딪혀 튕겨나갔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한 시간도 안 돼 결국 숨졌다. 불과 18살.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나흘 밖에 되지 않았다.
빠듯한 집안형편에 대학 등록금이라도 보태겠다고, 수능이 끝나자마자 배달 알바에 나섰던 착한 아들이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식지 않은’ 피자를 배달하기 위해 분주하게 도로 위를 달렸던 한 청년의 생명은 그렇게 식어갔다.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되는 배차시간에 운전기사가 쫓기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식지 않은 피자를 배달하기 위해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30분 안에 달려가야 하는 압박이 없었다면...안타까운 청년의 죽음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사진=자료사진)
◇30분 배달제 없어졌지만... 지난 2011년 2월, 18살 앳된 청년의 죽음이 있고 나서야 피자업체들은 뒤늦게 30분 배달제를 폐지했다. 그렇다고 일터에서의 ‘빨리빨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난달 1일 한 패스트푸드 배달 알바를 하던 24살 청년이 택시에 부딪혀 숨졌다. 배달 오토바이도, 택시도 모두 신호를 위반해 달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2km를 넘는 거리를 20분 안에 햄버거를 배달하기 위해 그는 오토바이 악셀을 당겼다. 30분 배달제가 폐지됐다고 하지만 5년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패스트푸드 업체들은 여전히 각 알바들의 시간 내 배달 실적을 챙기며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또 배달앱이 생기면서 음식점의 배달을 대행해주는 배달 대행업체도 여기저기 생겨났다. 콜이 뜨면 업체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시간 경쟁이 없을리 만무하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종진 연구위원 조사에 따르면, 서울지역 배달대행업체의 사고재해 1순위는 ‘제한시간 내 배달완료를 위해 무리하게 운전’이었다. 무려 40%를 차지했다. 배달앱의 등장으로 ‘빨리빨리’ 경쟁은 오히려 더 치열해지고 있다.
◇안전보건공단 “30분 배달제 폐지 뒤에도 배달알바 산재신청 2554명” 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30분 배달제가 사라진 이후 지난 3년간 배달 중 교통사고를 당해 산재보험을 신청한 배달원은 모두 2554명에 달한다.
특히 배달 도중 교통사고를 당한 19세 미만 청소년은 2011년 609명에서 2012년 491명으로 줄어든 이후, 2013년 430명, 2014년 436명으로 400명대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있다. 사망자도 13명에서 11명, 7명, 11명으로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이나마도 산재 처리를 받은 사례만 분류한 통계다. 앞선 노동사회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산재처리 비율은 패스트푸드가 8.9%였고 신종 배달대행업체는 2%에 불과했다. 따라서 산재처리를 받지 않은 배달 알바의 재해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광진구 구의역에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 중 사고로 숨진 김모(19) 씨를 추모하는 국화꽃과 메시지가 붙어 있다. 우리 사회는 2011년의 김군의 사망에 분개했지만 2016년 김군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사진=박종민 기자)
문제는 이같은 ‘빨리빨리’ 경향이 도로 위 뿐만 아니라 일터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5월 28일 발생한 구의역 사고에서도 ‘정비기사는 고장 접수 1시간 이내에 현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계약서 내용이 드러났다.
정비기사 19살 김군은 열차에 치여 숨지기 불과 몇 분 전에 회사에서 “을지로4가역도 고장 신고가 들어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가방 속에는 덩그러니 컵라면만 남아 김 군이 얼마나 시간 압박에 시달렸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2011년 김군의 사망에 분개했으나, 2016년 김군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빨리빨리’는 없어지지 않았고, 일터 사망도 줄어들지 않았다.
지난해 대한민국의 산업재해자는 9만명이 넘는다. 사망자도 1810명에 달했다. 우리보다 인구가 2배가 넘는 일본의 산재 사망자는 900여명이다. 언제까지 일터에서 ‘빨리빨리’를 외치고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