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대표적인 영미 작가 23인이 한데 모여 획기적인 단편집 프로젝트를 벌였다.
프로젝트의 지시사항은 간단했다.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인물’을 만들 것.” “단, 그렇게 탄생한 인물의 이름을 작품의 제목으로 할 것.” 이러한 ‘무한 자유’는 작가들을 매혹시켰고, 성별·인종·생물종 등 그 어느 것에도 제한을 두지 않은 창작 환경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자유롭게 쓰였기에 더욱 기발하고 강렬했으며, 짧은 분량 안에서도 서사들은 다채롭게 팽창했다. 여기에 참여한 작가의 수만큼이나 ‘인물’을 창조하는, 또는 ‘인물’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방법 역시 다양했다.
23인의 작가들이 탄생시킨 23인의 ‘타인’들, 그들의 삶은 우리의 일상을 새롭게 자극하면서도 묘한 데자뷰를 불러일으킨다. 그 어떤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작품을 창작하는 작업이 23인의 작가들에게 ‘해방’을 선사했다면, 이제 독자들이 그 자유를 맛볼 차례다.
여성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 ‘하이디 줄라비츠’는 인간적 정황에 무정한 판사이자 채식주의자 딸에게 햄 요리를 내놓는 무심한 엄마인 ‘글래디스 파크스슐츠’의 크리스마스 비극을 그린다.
크리스마스 햄 때문에 일어난 말다툼으로 (…) 글래드 파크스슐츠는 이미 익숙한 오그라든 기분, ‘엉망이 된 휴일’의 상태에 빠져버렸다. (…) 막상 이들이(자식들과 그들의 일시적인 연인들)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소외감이 들어 그다지 편치가 않다. 중요한 휴일에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낫다. 미움을 받고 살아 있다고 느끼는 편이 낫다. (본문 214쪽)
혼자 남은 그녀는 생전에 자신의 엄마가 좋아했던 초록색 안락의자에 앉아 어린 자신에게 지나치게 무심했던 엄마를 생각한다. 옆집에서 폭발이 일어나 죽을 뻔했던 자신에게 엄마가 아무렇지 않게 저녁을 먹으라고 했던 그날의 기억은, 외출금지당해 몰래 집을 나갔다가 어두워진 길이 무서워 커다란 돌을 쥐고 귀가한 어느 날 밤으로 뻗어나갔다. 어린 딸이 사라졌는데도 안락의자에 앉아 잠든 엄마의 모습에 그녀의 분노는 더욱 커졌고 돌을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갔었다. 글래디스는 어린 날 엄마에 대한 기억을 이리저리 헤집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딸을 생각한다. 아이들이 술이나 약에 취했을 거라고, 살인을 하기에 완벽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이디 줄라비츠는 이 세 모녀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긴장의 끈을 통해 모녀간의 애틋한 정만큼이나 자명하게 타오르는 비극의 불씨를 보여준다.
난 엄마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엄마를 안 지 이십 년이나 됐는데 말이에요. 난 왜 엄마가 엄마 같은 사람인지 모른다고요. 사람이 자기 자신인 것에 이유가 필요하니? 글래드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이것은 실비아가 그녀를 향해 던지는 모든 사소한 트라우마를 막아내는, 침착하고 법관다운 그녀의 방식이다. 그래. (본문 217쪽)
‘타인’은 별일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호기심과 셀렘을 가져다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16세에 희곡을 써서 데뷔한 이래 소설가, 영화감독, 행위예술가 등으로 활동하는 ‘미란다 줄라이’는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낯선 이와의 로맨스에 현실의 삶을 탁월하게 녹여냈다.
가끔 먹거나, 나가거나, 청소를 하거나, 잠을 잘 정도의 의욕도 내지 못해서 몇 시간씩 마냥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곤 하는 ‘나’는 뜻하지 않게 비행기 일등석 좌석을 얻게 된다. 항상 만만한 사람 취급당하며 지루한 일상을 견디고 있는 그녀의 옆자리에는 할리우드 스타 ‘로이 스피비’가 앉아 있다. 이 날아다니는 작은 마을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두 사람은 비행하는 내내 속삭이듯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안전벨트를 매고 테이블을 접어올렸다. 그 순간 로이 스피비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안녕.”
“안녕.” 나도 말했다.
“내가 번호를 하나 적어줄 건데, 평생 비밀로 해주었으면 해요.”
“알았어요.”
“이 전화번호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나는 사람을 시켜서 번호를 바꿔야 하고, 그건 정말이지 골치 아픈 일이에요.”
“번호가 하나 빠졌어요.”
“알아요. 마지막 번호는 그냥 외워줬으면 해요. 괜찮죠?”
“알았어요.”
“4예요.” (본문 112쪽)
그녀는 평생 이런 번호를 기다려왔다. 미란다 줄라이는 이 사랑 이야기가 마냥 아름다운 소설처럼 흘러가게 놔두지 않는다. 할리우드 스타의 전화번호는 특별한 사건이지만, 또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일상도 계속될 터였다. 언제고 다시 쳇바퀴 안으로 들어오고야 마는 우리들의 일상처럼 말이다. 과연 그녀는 용기를 내 전화번호를 누를 수 있을까?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와 관계를 하는 동안 나는 “사”라고 속삭이곤 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때 거기에 나를 확장해주는 작은 효력이 있음을 알았다.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나는 “사”라고 속삭였다. 딸이 멕시코시티에서 오직 신만이 알 일을 하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전화로 그애에게 내 신용카드 번호를 불러주면서 나는 속으로 ‘사’라고 말했다. 남편은 내 행운의 숫자를 두고 농담을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에게 로이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본문 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