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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25년 전 분신했던 '김기설'을 아십니까"

    [뒤늦은 부고] 1991년 5월 8일, '민주열사' 잠들다

    ◇ 혹시 '유서대필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1991년 5월 8일 고 김기설 씨가 남긴 유서 사본. (사진=유서대필사건 총자료집)

     

    2016년 5월 8일, 뉴욕타임스는 2009년 3월 25일 사망한 사람의 부고 기사를 신문지면에 올렸다. 부고의 주인공은 그린베레 출신의 베트남전 참전용사이며 이후 반전 인권운동가의 삶을 살다 간 도날드 던컨(Donald Duncan)이었다.

    베트남전 이후 반전운동에 앞장섰던 도날드 던컨은 당시 많은 언론에서 앞다퉈 그의 인터뷰 기사를 다룰 만큼 뉴스 밸류가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세상사가 다 그렇듯이 이후 언론이 그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고 던컨 역시 대중에게서 그렇게 잊혀졌다.

    다만 뉴욕타임스는 언론과 대중에서 자취를 감춘 던컨의 삶을 추적하고 있었다. 다른 언론사의 기사를 아무리 찾아봐도 던컨의 부고 기사가 없었기 때문에 뉴욕타임스는 던컨이 살아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가 수소문 끝에 던컨을 찾았을 때는 이미 고인이 된 이후였다. 살아생전 반전운동에 헌신했던 결단 있고 순고했던 삶. 뉴욕타임스는 그의 생애를 하루라도 빨리 정확하게 독자에게 알리기 위해 그가 죽은 지 7년만에 부고 기사를 올렸다.

    서두가 길었지만 기자도 뉴욕타임스가 했듯이 오늘 25년 전 부고 기사를 쓰려고 한다. 1991년 5월 8일 대한민국 사회에 '유서대필 사건'이란 이름을 남긴 당사자, 바로 故 김기설이 이 글의 주인공이다. 대부분 사람은 유서대필 사건 하면 강기훈을 떠올리지만 사실 유서대필 사건에는 또 다른 피해자, 김기설이 있다.

    1991년 당시 시대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노태우 정권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끊이질 않던 시절이었다. 대학가에서는 매일같이 시위가 있었고 화염병과 최루탄 냄새는 일상이었다. 여느 때처럼 시위가 한창이던 4월 26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이른바 '백골단'으로 불리는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이에 대학가는 분노가 차올랐다.

    이후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 천세용 학생이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으로 목숨을 끊었고 5월 8일 서강대 옥상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전민련) 사회부장인 김기설이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다. 바로 그때부터 이른바 '유서대필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서 배포한 속보 1호(사진 = 유서대필사건 총자료집)

     

    검찰은 김기설의 분신 이후 '분신 배후세력'을 운운하며 같은 전민련 총무부장인 강기훈을 유서대필 용의자로 지목했다. 이에 강기훈은 명동성당 항쟁과 자진출두, 재판을 거치면서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과 법원은 필적감정을 이유로 끝내 강기훈에게 유서대필과 자살방조죄 명목으로 유죄를 선고했고 강기훈은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유서대필 사건 발생 18년 만인 2009년. 당시 대법원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유서대필 사건 재심 개시 여부를 심리하기 시작했고 2012년 재심이 결정됐다. 재심 사유는 유서대필 사건 판결 당시 필적감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다시 긴 법정 공방이 있었고, 2014년 서울고등법원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하지만 검찰은 이에 불복해 즉시 상고했고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이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로써 유서대필 사건이 발생한 지 24년 만에 강기훈의 무죄가 확정됐다.

    유서대필 사건의 주인공이 강기훈은 최근 국가배상 소송과 관련해 정부와 또다시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검찰과 사법부는 당시 잘못된 수사와 판결로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줬지만 사과는커녕 그에게 배상의 책임조차 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기까지가 모든 사람이 잘 아는 '유서대필 사건'에 관한 현재까지의 이야기다.

    ◇ 잘 모르고 있는 '김기설 이야기'

    고 김기설 열사의 사진. {사진=유서대필사건 총자료집)

     

    1991년 당시 분신으로 정권타도를 외친 사람은 10명이 넘었다. 하지만 김기설은 유일하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분신을 한 사람으로 확정돼 있었다.

    강기훈의 무죄가 최종적으로 선고되던 날, 세상의 관심은 모두 검찰과 사법부로부터 공식적인 사과 한마디 받지 못한 강기훈에게 쏠려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김기설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유서대필 사건의 핵심은 필적감정이었다. 고인이 남긴 유서의 필적이 살아생전 글씨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대필 의혹의 시작이었다. 여기에서 ‘분신의 배후’를 찾는 검찰의 끼워 맞추기 수사는 유서대필 사건을 24년간 이어가게 한 원동력인 셈이었다.

    당시 김기설이 남긴 유서의 글씨체는 속필체. 흔히 말하는 필기체와 비슷한 글씨였다. 빠르게 쓴 글씨이기 때문에 비교 자료였던 정자체 글씨와는 차이가 컸다. 검찰은 이런 필적 차이에 한술 더 떠 유서에 쓰인 글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지적하며 고졸인 김기설이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여론몰이를 했다. 이때부터 김기설의 '민주열사' 의지는 크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이후 잘못된 필적 감정을 거치며 검찰과 사법부는 유서가 고인이 쓴 글이 아니고 배후세력인 강기훈이 쓴 것으로 판단했다.

    과연 그랬을까?

    사실 김기설은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기던 사람이었다. 평상시에도 습관처럼 메모했다. 그의 친한 지인은 김기설이 군대에 가기 전 대학생들로부터 정치·사회와 관련된 책들을 소개받기 시작하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더 많이 두게 됐고, 제대 후 자신의 진로를 굳힌 것으로 보고 있었다.

    김기설은 군복무 후 성남민청련이라는 단체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의 길로 들어섰고 일을 잘하는 것을 인정받아 전민련으로 추천돼 서울로 올라왔다.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고 김기설 열사의 묘. (사진=자료사진)

     

    검정고시 출신에 학력이 고졸인 김기설은 당시 운동권에 자신을 한양대 철학과 중퇴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한정덕'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는데 아마도 실제 한양대에 다니고 있던 자신의 제일 친구 '한OO'을 떠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김기설의 정확한 학력은 사망한 후에야 제대로 밝혀지는데 검찰은 이를 빌미로 엘리트 집단인 전민련이 고졸 출신인 김기설을 조직에 받아들이고 그를 회유해 분신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운동권은 자신을 숨기고 가명을 쓰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누구도 학력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학생들은 자신의 신분을 최대한 외부로부터 감춰 민주화 운동을 했다. 그리고 김기설은 성남 민청련에서 추천해 전민련으로 들어갈 만큼 실력이 있었다. 전민련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사회부장을 맡았다. 따라서 검찰이 주장했던 학력과 유서의 글솜씨와의 관계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검찰 측은 당시 김기설의 분신과 관련해, 그가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가족 역시 김기설이 사망할 당시 그럴만한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당시 김기설의 개인적 상황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분신 직전 김기설의 직책은 전민련 사회부장이었다. 그는 집회와 시위현장에 나가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집회와 시위를 돕는 실무자였다. 김기설은 분신정국 속에서 현장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속에서 수많은 경험을 했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스레 정권퇴진의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앞서 떠난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 속에 놓여 있었다.

    이런 시대 상황은 감성적이지만 순수하고 열정이 가득한 청년에게 고뇌에 빠지게 하기 충분했다.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고 김기설 열사의 묘. (사진=자료사진)

     

    김기설은 운동권에 들어간 이후로 당시 가족과의 관계도 썩 좋지 않았다. 가족은 군 제대 후 그가 운동권에 들어가며 집회와 데모를 하고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분실 7개월 전 김기설은 큰 누나 집에서 약속어음 230만 원과 현금 20여만 원을 몰래 가지고 나왔다. 이 사건 역시 김기설을 여러모로 난처하게 만들었다.

    김기설은 전민련에 들어온 얼마 뒤 강기훈으로부터 여자친구를 소개받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연애도 쉽지 않았다.

    분신 바로 전날인 5월 7일 밤, 김기설은 여자친구를 만나 자신의 분신 의지를 내비쳤다. 김기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수첩을 여자친구에게 건네고 자신을 붙잡는 그녀를 지하철로 밀어 넣은 뒤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김기설은 분신 바로 직전인 5월 8일 아침 6시 30분쯤 여자친구에게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여자친구의 질문에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전 8시 5분, 김기설은 서강대학교 본관 4층 옥상에 올라섰다. 본관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입고 있던 재킷에는 유서가 있었다. 그는 재킷을 벗어 놓고 옥상 끝에 섰다

    "민자당을 해체하라!"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

    이후 불길이 그의 몸을 휘감았고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고 김기설 열사의 묘비. (사진=자료사진)

     



    #참고자료
    거짓말 잔치(2015년).
    그것이 알고 싶다 –유서대필 사건 편- (2007년)
    그것이 알고 싶다 –유서대필 사건 편- (2015년)
    유서대필사건 총자료집(1991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유서대필 사건 편- (2002년)
    화월(2014년)
    V파일 –유서대필 사건 편- (2011년){RELNEWS: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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