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파라노숙지앵'의 저자 장-마리는 20년 경력의 노숙자이자 자칭 구걸 전문가이다. 어느 날 장-마리는 상젤리제의 드러그스토어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온 헌법재판소장 장-루이 드브레를 알아보고는 농담을 건넨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셔야죠!” 드브레는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당신이 국무총리를 하면 되겠군요.”
그 후로 둘은 종종 드러그스토어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헌법재판소장은 노숙자의 삶에 관심을 갖는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길에서 어떻게 밤을 보내는지, 다른 삶을 살 마음이 있는지. 그리고 장-마리를 통해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싶었던 드브레는 그에게 책 쓸 것을 권한다. "왜 유명한 사람들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야 하는가?" 맞춤법도 잘 모른다며 걱정하는 장-마리에게 드브레는 단 한 가지만 지키면 된다고 충고한다. 아무것도 감추지 말 것! 그렇게 장-마리는 2년 여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두꺼운 공책 세 권에 써내려갔다. 드브레와 장-마리는 몇 달 동안 같이 읽고 대화를 나누며 내용을 다듬는 공동 교정 작업을 해나간다. 그러면서 진실한가를 끊임없이 확인한다.
이 책은 거리가 좋아 거리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노라고 고백하는 한 노숙자의 진솔한 거리 인생 이야기이고, 그가 보여주는 ‘다른 세계’ 이야기다. 프랑스에서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장-마리와 장-루이 드브레가 함께 TV 토크쇼에도 출연하는 등 화제를 낳았지만, 장-마리는 여전히 거리의 삶을 살고 있다.
노숙자 장-마리와 헌법재판소장 장-루이 드브레가 함께 있으면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어? 저기 노숙자랑 같이 있는 사람 장-루이 드브레 아니야?” 경찰들은 헌법재판소장이 노숙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다가와 묻기도 한다. “별일 없으신가요?” 사람들은 장-마리가 다가가면 바쁜 척을 하려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그를 지나치면 바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한다. 구걸하는 장-마리를 멸시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보도에 죽치고 앉아 있는 똥덩어리 같은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노숙자도 이름이 있고, 사연이 있다. 그들의 삶 곳곳에도 빛나는 순간들이 있으며, 그들도 우정을 나눈다. 다만 그들은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삶에 대응하는 방법에 무지했거나, 선택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에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이른바 양심이 있다는 이들에게 우리는 공격적인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를 경멸하거나 증오한다. 그렇지만 개중에는 편견 없이 우리를 도와주려 하는 이들과의 좋은 만남이 있었다. - 200쪽
우리는 건전한 패거리였고, 다 함께 나누고 사는 그런 사이였다. 우리 중에 누구 하나가 생일을 맞으면 그 사람은 구걸을 해서도, 호객을 위해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해서도 안 되었다. 우리가 그 사람 몫까지 담당했다. 그에게 먹을거리와 담배, 창녀를 구할 수 있는 돈을 주었으며, 때때로 근처에 작은 여관방이라도 구해줄 수 있는 돈이 모이면 그렇게 했다. 유쾌했다. 진정한 친구 녀석들과 함께해서 행복했다 - 105쪽.
마흔일곱, 20년 경력의 노숙자 장-마리. 지금은 목 좋은 곳을 찾아 자리를 옮기기도 하고 단골도 있는, 은방울꽃이 잘 나가는 시기에는 꽃을 값싸게 사서 이윤을 남기며 팔기도 하는 구걸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지만, 자신이 구걸을 업으로 삼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당연히 내 책임이다. 내 인생은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랬다는 뜻이다. - 21쪽
숱한 불행과 방황 끝에 결국 구걸은 그의 직업이 되었다. 술꾼이나 행인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 걷어차이거나, 다짜고짜 보호 시설로 보내버리는 경찰을 피해 늘 경계태세를 유지해야 하지만 거리는 그의 터전이다. 그는 거리에서 어떤 방법으로 순례자들에게 다가가야 하는지 조금씩 배웠고, 돈을 줄 사람과 주지 않을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을 익혔다.
쇼핑하는 사람들에게 주차단속이 뜰 것 같으면 미리 알려주고, 자전거도 봐주면서, 점잖은 구걸인으로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스스로 구걸 분야의 프로라고 말하는 그에게 구걸은 여러 직업 중의 하나이다.
오가는 행인들을 ‘순례자’라고 부르는 장-마리는 거리에서 돈을 벌고 사랑을 하고 친구들을 사귄다. 자살하려는 남자를 다독여 그가 갑자기 말없이 가버릴 때까지 같이 구걸을 하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혼자서 말없이 구걸하는 사람에게 ‘선장’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먼저 다가가 먹을 걸 나누기도 한다. 같이 구걸하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장-마리가 길게든 짧게든 함께한 ‘구걸 친구들’의 다양한 거리 인생 앞에서 노숙자라면 대개 어떠할 것이라는 편견이 무색해진다.
거리는 정말 힘든 곳이다. 거리에서 먹고살 돈을 벌고, 주도권을 잡고, 내 자리를 차지하려고 나를 밀어내거나 쫓아내려는 사람들에 맞서고, 추위에 견디고 비를 맞아야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하는 게 더 낫지”와 같은 지적을 듣거나, 사람들이 은근히 보내는 경멸적인 시선을 받아들이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렇지만 이곳이 나의 세상이고, 나의 세계다. - 158쪽
장-마리는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을 본다. 드러그스토어 앞이 주 활동무대이기 때문에 유명인사들도 많이 보고, 인심 후한 인사들도 많이 본다. 한 번은 모로코의 공주가 일주일 내내 오면서 날마다 100유로씩을 준 일도 있다.
그러나 거리의 일상은 힘들다. 행인들의 모욕, 욕설, 경멸하는 눈초리와 맞서야 한다. 사람들은 노숙자들을 ‘보도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똥 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욕하며 정말 그런 존재로 치부한다. 장-마리가 다가서면 사람들은 바쁜 척을 하려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그를 지나치고 나서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는다. 그를 보고는 다른 쪽 길로 건너가기도 하고, 기침을 하기도 하고, 그를 피하려고 더 빨리 걷기도 한다. 때로는 멀리 있는 누군가를 찾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신문 첫 장을 읽는 척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쇼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 모든 행동들을 장-마리는 알고 있다.
정치인들, 또는 내 친구들이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때로는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산다. 이들은 보통 인심이 후하지는 않다. 어떤 정치인은 항상 노숙자들과 거리를 둔 채 경멸의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절대 동전 하나도 건네주려 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끔찍하게 여겼던 사람은 알랭 들롱이었다. 잘난 척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못되게 말하기도 했으며, 멀리 쫓아버리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뭘 원하는지 알아. 하지만 난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야.” 그러고선 떠나버렸다. - 140쪽
그녀는 거리에서의 삶이 가끔은 정말 힘들다고 했다. 이미 여러 차례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남자 새끼들은 그녀가 오럴 섹스를 해주거나, 그녀를 만지게 놔두어야만 돈을 주려고 했다. 세실은 창녀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206쪽
노숙자들을 피하고 조심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여행객들도 마찬가지다. 노숙자들에게 파리의 8월은 버림과 무관심의 시간이다. 그들이 알고 지내던 이들은 휴가를 가서 없고, 대신 그들을 믿지 못하고 경계하며 무서워하는 관광객들로 거리가 붐빈다. 여행객들은 노숙자들이 가방이나 돈을 훔칠까 봐 걱정하며 경계하지만, 사실 그들 입장에서 이런 관광객들은 보통 단체로 몰려다니기 때문에 별 기대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노숙자들이 다가가면 단체로 적의를 내보인다. 특히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은 노숙자들이 파리 거리의 무슨 독특한 이미지라도 되는 듯이 사진을 연신 찍어대면서도 노숙자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웃음도 동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