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변기가 우릴 만나게 해준 거요. 운명적으로.”
_「머리 위를 조심해」
이수진의 첫 소설집 '머리 위를 조심해'가 출간되었다. 이수진은 등단 초기부터 부끄럽거나 불편하거나 폭력적이어서,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이 대체로 가장 안쪽에 숨겨져 있어 쉽게 드러내기 힘든 인간의 욕구들을 과감하게 파헤쳐왔다. 경쾌하고 속도감 있게 서사를 밀고 나가다가도 때때로 이러한 감춰진 욕구들을 날것 그대로 묘파해냄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애써 잊었거나 부정했던 ‘진짜’ 현실과 어색하게 마주서게 만든다.
표제작 「머리 위를 조심해」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전봇대 밑에서 잠을 깬 주인공은 전날 자신이 누구와 어떻게 술을 마시고 거기서 잠든 것인지 기억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 갑작스런 ‘변의’가 밀려오고, 다급하게 이 배변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장소를 찾아 나선다. 여기서부터 식은땀이 날 만큼 생생하고 집요한 변의에 대한 묘사가 시작된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해설(「괄약근 vs 불수의근」)에서 변의에 대한 묘사만큼은 “한국문학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탁월”하다고 극찬했다. 항문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문장들에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한 후에는 느닷없이 세 개의 변기를 등장시킨다. 그러고는 변기의 주인과 ‘인물, 사건, 배경’에 대한 황당한 문답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은 뜻대로 이루어지 않는 현실 혹은 소설세계에 대한 반감과 주인에 대한 살의로까지 나아간다. 이처럼 이수진의 소설은 가독성 높은 문장들을 리드미컬하게 따라 읽는 재미가 있지만, 그 안에 감춰진 비의들까지 발견해낸다면 불편하고 불합리한 세계를 지탱하고 살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묻게 된다.
길에서 마주친 아줌마를 두고 소설가 지망생, 실력 없는 소매치기, 편의점 야간 알바인 세 친구가 내뱉는 동상이몽을 맛깔나게 그린 「갈매기는 끼룩끼룩 운다」, 끊임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내야 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공포스럽게, 그러나 그 공포가 우리 삶에서 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시킴으로써 인간 존재의 무기력함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마니차」, 전자발찌를 찬 이웃에 대한 섣부른 오해, 그러니까 내가 다치지 않기 위해선 남을 먼저 해해야 한다는 고단하고 처연한 현대인의 피해망상이 만들어낸 파국을 다룬 「전발씨」, 마조히즘적으로 구멍난 이를 자극하는 것에서 삶의 희락과 목표를 찾아야만 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그려낸 등단작 「원초적 취미」 등도 빠르게 읽히는 속도에 반비례해 오랜 여운을 남기는 ‘속 깊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 축제」는 화자인 아들의 환각 같은 진술을 통해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되묻고 있다.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하나 세심하게 읽어야 의미를 파악해낼 수 있는 것은 「벽장」도 마찬가지다. 벽장 속의 화자는 자신이 벽장에 갇힌 것인지 혹은 스스로 들어온 것인지, 벽장에서 나가고 싶은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끊임없이 자문하며 스스로를 분열시킨다. 더욱이 벽장 밖에서는 수많은 ‘그’들이 문을 두들기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기도 하며 화자를 더욱 혼란에 빠뜨린다. 스스로를 통제하기도 버거운 세계를 사는 우리가 한 번쯤 꿔봤음직한 몽롱한 꿈 같은 소설이다. 특히 이 작품에는 카프카의 『변신』의 일러스트를 그린 루이스 스카파티를 연상케 하는, 작가가 직접 그린 빼어난 그림이 실려 있어 생동감을 더한다.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대단히 멋진 꿈」은 실직중인 불면증 환자의 꿈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꿈이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이국적이면서도 낯설고 매혹적인” 문장들을 좇아 읽는 즐거움이 있는 작품이다.
책 속으로
거기까지 외친 저는 꺽꺽 소리내어 오열했습니다. 정말 눈알을 쏟아낼 듯 울어댔어요. 나는 김준규가 일말의 죄책감이나 동정심을 품길 바랐습니다. 저를 좀 불쌍히 여기길 바랐어요…… 하지만 김준규는 저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말없이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저는 훌쩍이며 생각했죠. 그래, 아주 떠나버리라지.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이 나을 거야. 그러나 그는 금세 돌아와 제 팬티를 끌어내렸습니다. 따뜻하게 데운 수건으로 사타구니를 꼼꼼히 닦아준 다음 새 속옷으로 갈아입혀주었어요. 그러더니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기…… 힘들겠지만, 힘내.
_「마니차」
나는 창가에 앉아 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옅은 안개가 우무처럼 바깥을 감싸고 있는 게 보였다. 어쩐지 비가 올 것만 같았다. 맑고 축복받은 날씨가 될 것이라고, 라디오는 얘기했지만 모두가 속고 있는지도 몰랐다. 모두를 속이는 일은 아주 쉽다. 둘이나 셋을 속이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다.
_「아버지 축제」
단 한 번의 이완이 모든 것을 망칠 것이었다. 이성의 끈은 당겨질 대로 당겨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늘어져 있었다. 이제 틀렸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축축하고 음흉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냥 싸버려. 알 게 뭐야. 어차피 모르는 동네잖아. 더이상 참을 수도 없잖아. 편해질 거야.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거야…… 제기랄, 입다물어. 난 아무데나 똥을 누진 않을 거라고…… 호기롭게 윽박았지만 목소리가 옳았다. 더는 참을 자신이 없었다.
_「머리 위를 조심해」
내가 그곳을 벗어나 다른 어딘가, 이를테면 거실의 구석빼기나 식탁 밑에 자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내 기억이란 게 늘 창가에서 시작하곤 했으며, 아주 처음부터 거기 앉아 있었던 것만 같아서였다. 더 이전의 것을 더듬어보려 해도 매우 어렴풋하게 역겨운 누린내 외에는 떠올릴 수 없었고, 그건 차라리 모태의 기억을 빙자한 망상인 듯했다. 나의 시작을 모른다는 것, 또 그것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 내 고착의 먹이가 되었다
_「벽장」
내가 내 집 좀 갖겠다는데, 좀 살아보겠다는데, 이 서울 땅에 등 좀 누이고 있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이냐는 억울함이 들끓었다. 그냥 서로 없는 사람처럼, 조용하게, 피해를 주지도 받지도 않고 좀, 각자
의 관에 누운 시체들처럼 살면 안 되겠느냐고, 나는 토로하고 싶었고 차라리 애원하고 싶었다.
_「전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