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청와대 제공)
당초 일정보다 사흘 늦게 열린 20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의혹' 이후 처음으로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관련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두 재단의 설립 배경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대신, 최순실씨의 '재단 사유화' 의혹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박 대통령은 17분 가량의 회의 모두발언에서 절반 이상을 미르 의혹 언급으로 채웠다. 이를 글자수로 환산하면 전체 5600자 남짓 모두발언 중 3100자 이상이 관련 언급에 할애됐다.
미르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데 회의가 적극 활용된 셈이지만, 관련 언급 중에 대다수는 재단 설립 취지와 배경 및 성과를 설명하는 데 쓰였다. "재단들이 저의 퇴임 후를 대비해 만들어졌다는데, 그럴 이유도 없고 사실도 아니다"라는 해명도 했다.
박 대통령은 △두 재단이 창조경제와 문화융성 융·복합의 축이었고 △기업들과의 소통을 거쳐 기업의 뜻을 모아 설립됐으며 △과거에도 기업 후원으로 사회적 역할을 하는 재단은 많았으며 △두 재단은 설립 취지에 맞게 해외순방 과정에 참여해 '코리아 프리미엄'을 전세계에 전파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순실씨가 이들 재단을 장악하고 있다는 관계자들 증언, 독일에 페이퍼컴퍼니를 차려 재단 자금을 빼돌리려 했다는 의혹, 딸의 이화여대 학사 특혜에 개입한 정황, 대통령 연설문까지 손질하는 등 국정에 관여했다는 주장 등 각종 의혹에는 직접 언급이 없었다.
청와대 참모가 재단 자금 모집에 관여했다는 의혹 역시 거론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어느 누구라도 재단과 관련해 자금 유용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는 선언적 언급만 했고, "더 이상의 의혹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감독 기관이 감사를 철저히 하라"는 지시만 내렸다.
대신 "가뜩이나 국민의 삶의 무게가 무거운데 의혹이 의혹을 낳고 그 속에서 불신은 커져가는 현 상황", "더 이상의 불필요한 논란이 중단되기를 바라는 마음", "의미 있는 사업에 대해 도를 지나치게 인신공격성 논란이 계속 이어진다면 부정적 영향" 등의 표현으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자금 유용 등 불법행위' 외에 다른 의혹들은 비본질적 사안으로 간주된 셈이고, '과거 재단들 사례'가 언급된 점은 미르재단 등의 합법성을 주지시킨 셈이다. 수사를 진행 중인 검찰에 대한 가이드라인으로 인식될 소지마저 있다.
사흘이나 회의를 미룬 채 정리한 입장 치고는 부실하다는 지적이다. 여권 관계자는 "국민들이 의심하는 것은 '권력 개입'인데 일개 재단의 횡령 의혹으로 사안의 범위를 좁혔다"며 "논란 발생으로부터 몇 달이 지나도록 청와대가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있는 게 거듭 확인된다"고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