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 건축과 공간에서 시대의 징후를 읽은 책 '건축 멜랑콜리아'. 이 책은 국회의사당과 광주시민회관,대공분실과 아현고가도로 등 16개의 건축과 6개의 공간을 다룬다.
이 책이 다루는 내용 중에는 김중업의 ‘서산부인과의원’, 김수근의 ‘세운상가’처럼 걸출한 건축가의 대표작이나 시대를 대표하는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도 있지만, 일상에서 마주치는 이름 없는 생활공간, 또는 발전소, 지하도, 도로 등 도시 설비와 인프라에 해당하는 곳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일상 공간들은 저자 특유의 관점과 읽기 방식을 통과해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그 공간들의 목록은 ‘자유센터’, ‘국방부 구관’, ‘국회의사당’, ‘광주시민회관’ 같은 국가·공공기관의 건축물에서 ‘세운상가’, ‘유진상가’ 등의 상업·주거 공간, ‘당인리발전소’, ‘아현고가도로’, ‘고속버스터미널’ 등의 현대적 시설, ‘성 니콜라스 성당’, ‘여의도순복음교회’, ‘도원빌딩’ 등의 종교적 건축뿐만 아니라 ‘종묘공원’, ‘가리봉동’, ‘노을캠핑장’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저자 이세영은 좌절된 채 남아 있는 도시 공간을 때론 비판적으로, 때론 애정 어린 시선으로 공력을 들여 바라본다. 이를 통해 압축적 근대화와 성장 제일주의에 밀려 많은 것을 잃고도 대부분이 슬퍼하지 않았던 도시에 대한 애도 작업을 시도한다.
'건축 멜랑콜리아'는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통해 병의 기원을 탐지하듯 건축과 공간을 징후적으로 해석하려 한다. 건축물은 부의 증식을 위한 투자 대상이거나 건축가 고유의 조형 언어로 완성된 예술 작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풍부한 의미를 담지한 채 능동적 해석을 기다리는 문화 텍스트이자 국가와 자본의 권력이 작동하는 사회적 매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건축과 공간을 하나의 완결된 텍스트로 꼼꼼히 읽고 분석한다.
국가와 자본의 지배 전략 건축과 장소에서 그것을 기획한 국가와 자본의 의도, 공간에 투영된 권력의 통치 전략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박정희 정권이 세운 여러 정치적 기념비와 유신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남산의 자유센터를, 저자는 반공주의란 동시대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기념하는 독특한 ‘정치적 신전’이라 이름 붙인다. 여기에는 위엄과 숭고미가 강조된 건축물을 이용하여 독재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국가권력의 전략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가의 이름으로 잔인한 고문이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의 사례에서는 건물의 내부 구조와 설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사받는 사람에게 공포를 유발하고, 복종하는 신체를 만드는 데 기여했는지를 분석한다.
종로 일대의 슬럼을 2개월 만에 쓸어내고 건설된 대규모 주상복합건물인 세운상가는 네 개의 건물군이 일렬로 늘어서 당시 주변 풍경과 대비를 이루는 압도적 수직성과 육중한 몸체를 구현했다. 개발독재 정권은 근대화와 경제 성장이라는 집권 명분과 스스로의 치적을 효과적으로 전시하는 매체이자 스펙터클로 이를 이용했다. 한편으로 ‘도시 안의 도시’를 꿈꾼 설계자의 구상과 이상이 애초부터 이윤 논리에 밀리면서 세운상가가 실제 완성된 모습은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건축에서 읽어낸 역사의 층위 역사와 시대의 영향 아래 건축물은 지어졌고, 건축물 역시 자신의 역사를 쌓아오며 주변 공간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국회의사당에 애초 계획에 없던 돔 지붕이 의원들의 요구로 추가되는 동안 입법부와 의회민주주의는 군부독재에 의해 그 어느 때보다 무력화되었고, 유진상가는 상가아파트로서는 이례적으로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서울 요새화 계획’의 일환으로 군사 시설로서의 역할을 떠안게 되었다. 통일교회는 순복음교회가 한국 사회의 경제적 발전 정도에 발맞춰 기복적 신비주의에서 세속적 성공주의로 신앙 담론을 이동한 것과 같은 변화를 감행하지 못했고, 순복음교회가 여의도에 입성하여 세계 최대 교회로 성장하는 동안 마포대교의 바로 입구에서 인정투쟁을 위한 행진을 멈추어야 했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역사적 사건과 흐름을 단순한 배경지식으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열주 구조에 억지스레 돔을 얹어 권위나 위엄을 과장한 의사당의 외관에서, 보통 상가보다 높은 유진상가의 1층 필로티 공간과 상가 전체의 견고한 철근콘크리트에서,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형상과 풍경에서 그 너머의 맥락과 시대의 열망을 독해하고 있다.
공간 이용자의 욕망, 심성과 실천 저자가 공간을 읽어나가며 주요하게 살피는 것 중 하나가 공간을 실제로 점유하고 이용했던 사람들이 그 속에서 원하고, 느끼고, 상호작용했던 바다. 공간 이용자들의 실천은 공간을 기획한 건축가의 의도나 국가와 자본의 이해를 벗어나 공간의 정체성과 의미, 공간을 지배하는 분위기를 전유하고 바꾸어낸다.
가령 연세대 학생회관은 애초 건축가와 건축주에 의해 종교적 ‘신실성’을 구현하는 곳으로 기획되었지만 학생운동의 성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졌다. 열사들의 죽음이 사건화되는 현장이었던 학생회관은 실제 공간을 점유하고 사용했던 학생들의 실천에 의해 ‘진정성’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후 학생운동이 쇠퇴한 사이 대학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었고, 학생회관이 상징하는 가치와 정서는 학생들의 욕망과 심성 구조의 변화를 반영, 다시 ‘속물성’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이념의 기념비를 꿈꿨던 자유센터가 냉전 해체와 이념 대결의 쇠퇴를 겪으면서 여러 업체에 임대되고, 과거의 위세를 잃어버린 상황 역시 공간의 의미를 결정짓는 것은 이용자들의 활동임을 보여준다.
이렇듯 이 책은 건축가의 기획을 주로 분석하는 다른 건축 서적들과 달리, 공간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다양한 개인들의 미시적 활동과 집단 무의식을 함께 읽고자 한다. 또한 이런 시도는 이론서, 신문 잡지, 국가기록물, 구술 기록 등 다양한 문헌의 활용, 직접 취재한 내용 등으로 뒷받침돼 책의 서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러한 공간비평의 방식은 곧 문화비평이자 사회비평으로 이어지며, 빙산의 일각처럼 건축의 보이는 것 아래에 존재하는 더 많은 내용들, 공간과 역사를 이해하는 유용한 방식을 제안한다.
김중업이 서산부인과의원 설계에 착수한 1960년대 초는 ‘정치 산술’ 성격의 인구 담론이 빠르게 확산되고, 국내에서 처음 산아제한에 중점을 둔 ‘가족계획’이 국가 시책으로 도입된 시기였다. 가족계획은 성교와 임신, 출산 같은 개인의 생식 활동에 국가권력을 삼투시키는 통치 테크놀로지라는 점에서, 그것의 국가 시책화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근대 생명관리권력의 특징으로 꼽은 ‘생명 현상의 국유화’가 본격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했다. (16쪽)
시장에 취임한 김현옥은 행정의 우선순위를 건설에 두었다. 1966년 시 예산의 10퍼센트에 불과하던 건설 예산을 50퍼센트로 확대했고, 이듬해에는 그 비율을 75퍼센트까지 높였다. 이런 김현옥의 방침은 박정희를 만족시켰다. 1967년 재선을 노리는 박정희에게 수도 서울의 변화된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내건 ‘근대화’의 성과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현옥의 눈이 고가도로에 꽂힌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대지 위로 떠올라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뻗어나가는 고가도로야말로 20세기 인류가 꿈꿔온 미래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70쪽)
일상의 공간들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고 낯선 공간으로 다가온다!1960~1970년대의 압축 성장을 추진한 박정희와 불도저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은 행정가 김현옥의 만남은 아현고가도로, 광화문 지하도 등 여러 입체적인 교통 시설들을 건설함으로써 도시의 이동 속도를 높이고, 발전과 개발을 상징하는 도시경관을 창조했다. 과거 고속버스터미널 호남선의 왜소한 모습과 대규모 상업 시설을 갖춘 경부선 터미널의 화려한 외관의 격차는 지역 차별을 표상하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복개와 복원을 거쳐 오늘날 대표적인 도심 하천으로 자리 잡은 ‘청계천’의 역사, 구체적인 풍경과 여러 구성물에서 집단적 소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여전히 남아 있는 청계고가의 교각은 개발 시대의 영광을 희미하게 상기시키며, 현재의 복원된 청계천을 만든 도시재생의 논리가 패배하게 될 때 청계천이 맞닥뜨릴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직접 청계천에 대한 추억이나 소망을 그린 타일 벽화는 청계천의 벽면에 걸린 채 사람들이 청계천이라는 인공 자연에 기대하고 소망한 것이 무엇인지 반영하고 있다.
세운상가는 건축물에 반영된 당대의 축적체제와 국가, 자본, 시민사회의 역학 관계 등 역사적 현상태를 ‘온몸으로’ 발언한다. 그 발언의 속기록엔 자기과시, 억압, 무책임성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국가권력의 헤게모니 부재 상황, 근시안적 이윤 추구를 속성으로 하는 동시대 자본의 천민성, 관변 예술가의 좌절된 기술 이상, 시민사회의 불임성 같은 우울한 목록들로 가득하다. 세운상가는 한국 모더니티의 알레고리이자 자서전이다. (97쪽)
저자 이세영은 연세대 신학과와 같은 대학 사회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2002년 《서울신문》에 입사해 사회부, 국제부, 정치부를 거쳤다. 2008년 《한겨레》로 옮긴 뒤에는 문화부 학술담당과 한겨레21부 사회팀장을 지내며 사상, 문학, 건축 등으로 관심 영역을 넓혀왔다. 현재 『한겨레』 정치부 기자로 야당을 출입하고 있다. 노동정치의 위기와 노동계급 2세들의 악마화 메커니즘을 고발한 『차브』를 공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