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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 개신교· 불교, 위기의 시대를 진단하다

책/학술

    한국 가톨릭· 개신교· 불교, 위기의 시대를 진단하다

    신간 '지금, 한국의 종교'

     

    21세기, 한국의 3대 종교인 가톨릭·개신교· 불교가 1년 가까이 포럼으로 만났다. ‘종교를 걱정하는 불교도와 그리스도인의 대화: 경계 너머, 지금 여기’의 주제로 말이다.

    고려대 철학과 조성택 교수가 불교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이기도 한 김진호 목사가 개신교를,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 소장이자 가톨릭프레스 편집장이 가톨릭의 대표로 나섰다. 이들은 자신의 종교를 각각 내부자의 시선으로 비판하며, 각 종교의 문제점과 그 이유를 진단했다. 그러나 이들은 원효의 화쟁 사상처럼 싸우되 평화롭게 싸우며, 종교 간 경계를 넘나들면서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한다.

    신간 '지금, 한국의 종교'에서는 발제자 3인의 성역 없는 비판과 종교를 넘나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눈 논의와 대담, 그리고 청중들의 진지한 질문과 반론도 정리하여 함께 수록했다. 각각의 종교가 ‘무엇이 걱정인지’, ‘왜 걱정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주제로 총 아홉 차례에 걸쳐 발제와 토론, 질의응답으로 구성했다. 이른바 한국 3대 종교의 화쟁적 대화의 결과물이다.

    이 책에는 각각 종교에서 바라보는 ‘옳음들’이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는 오만과 편견을 깨고, 도인불교에서 벗어나 ‘시민보살’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교회와 한 몸이라는, 신체 기관의 위계성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몸의 연결성에 중점을 두고 한 곳이 아프면 다른 곳도 아프게 된다는 관점에서 바울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가톨릭은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유와 해방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들은 각자의 옳음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종교를 이해하며 옳음‘들’의 화쟁을 도모한다. 아울러 한국 사회에서 종교라는 커다란 코끼리를 더듬어 나가며, 앞으로 종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해 나간다.

    이 책의 토대가 되는 포럼에서 기조 강연을 한 종교학자 오강남은 “탈종교화 시대에 불교, 개신교, 가톨릭에 소속된 중견 학자들이 각기 종교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에 대해 서로 경계를 넘어 의견을 교환하며 종교 활성화를 모색했다”라고 평하며 추천의 글을 썼다. 이 책은 각 종교의 지성인들이 종교계, 나아가 한국 사회에 내리치는 죽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

    개신교가 ‘타인이 악마다’라고 주장한다면, 가톨릭은 ‘나는 천사’라고 말한다. 자신이 천사라는 말이 타인은 악마라는 뜻을 논리적으로 포함하진 않지만, 정서적으로 타인을 나보다 아랫사람으로 얕잡아보기 쉽다. 가톨릭은 하느님이 주신 구원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자신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덜 관용적이기 마련이다. 더구나 진리를 안다고 확신하면서 권력을 독점하려 애쓰는 경향이 있다. 진실로 진리를 아는 사람은 권력을 멀리 할텐데 말이다. (92p_ 가톨릭교회가 보이는 권위주의의 두 모습)

    지금 한국 불교에는 감동이 없다. 종교가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생명체에 비유하자면 생명이 없는 것과 같다. 로봇의 정교한 움직임은 감탄을 자아내지만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뒤뚱거리는 발걸음은 바라보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생명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불교의 수행 문화를 살펴보면 불교가 지나치게 교리화 혹은 일종의 원리화되어 있어 일상의 가르침을 주지 못하고 있다. (177p_감성의 복권: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

    개신교계에는 재건축의 신화가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빚을 내서라도 교회당을 크게 지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재건축의 신화는 교회의 성장뿐 아니라 교인 개개인의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대형교회는 거대한 인맥 공장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그 인맥 공장의 일원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도들도 기회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220p_성형사회의 그리스도교_대담 중에서) 그리스도교는 그 타자가 ‘저 높은’ 공간의 존재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공간의 존재다. 신이 지극히 낮은 그곳으로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의 도래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지극히 높은 타자’라는 속성은 그리스도로 인해 사라지고, 그 신은 이미 ‘지극히 낮은 타자’가 되었다. 요컨대 그리스도교 영성은 지극히 낮은 타자와 나/우리의 만남, 그로 인한 두 존재의 자기 초월적 유착을 가리키는 감성적 언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영성 현상에서 타자성의 몰락과는 다른 가치의 영성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사회적 영성’이다. (241p_사회적 영성, 타자됨의 영성)

    화쟁의 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견해가 일종의 조건문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고통이다)와 같은 종교적 가르침도 예외는 아니다. 조건문이기 때문에 일정한 관점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그 견해가 설파되는 맥락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조건이 없는 그리고 맥락을 떠난 절대적 견해는 없다. 특정한 의미와 맥락에서만 참일 수 있다. 그러나 진영논리는 견해의 조건성과 맥락을 용인하지 않는다. 자신의 견해는 무조건 옳고 상대의 견해는 무조건 틀렸다. 그러나 무조건의 견해는 없다. 화쟁의 개시개비는 모든 견해가 조건적임을 용인하는 데서 출발한다. 서로 충돌하는 배타적 견해를 양자택일의 갈등 국면으로 이해하지 않고 둘 다 맞는 말로 받아들일 때, 다시 말해서 모순을 용인할 때 상황을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다. (306p_원효의 화쟁론과 화쟁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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