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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학술

    '조선 국왕 장가보내기'

    구혼과 처녀간택부터 첫날밤까지 국왕 혼례의 모든 것

     

    '조선 국왕 장가보내기'는 구혼과 처녀간택부터 첫날밤까지 국왕 혼례의 모든 것을 세세히 다룬다.

    이 책은 국왕이 전국에 공개 구혼하는 ‘제1절차’로 포문을 연다. 지난한 처녀 간택 과정이 지나가고 낙점을 받은 ‘비씨’는 별궁생활을 시작하는데, 궁궐에 들어와서 온갖 낯선 절차와 뭇사람의 시선을 받아내야 했던 그들의 생활을 재구성했다. 이어 본격적인 혼례 준비에 들어가는 궁궐은 납채와 고기 등 신랑과 신부가 주고받아야 했던 물품 및 잔치에 들어갈 돈과 물품까지 챙기는 등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한 여인이 궁궐로 들어와 왕의 부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바로 ‘왕비’로 책봉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왕비는 왕과 ‘동급’의 지위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려야 했고 이를 위한 권위와 상징 부여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윽고 왕과 왕비가 얼굴을 마주하는 친영과 백관이 참석하는 동뢰연을 거쳐 첫날밤을 보내게 된다.

    이 책은 이러한 과정을 하나하나 밟아가면서 세부적인 절차와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역할, 실제 사례에서의 돌발사태 등을 설명해나간다.

    지금까지가 제1부의 얼개라면 제2부에서는 ‘후궁’ 들이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역대 조선 국왕은 대부분 후궁을 두었는데, 그들은 ‘첩’이기보다는 ‘왕비가 될 수 있는 존재’이자 예비 주자로서 그에 걸맞은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 책은 후궁을 보는 기존 시각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후궁의 간택과 육례의 모든 것을 밝히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로서 국가 가례로 치러진 숙의의 국혼을 다뤘고, 후궁을 높이기 위한 영조의 정책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책 속으로

    ㆍ국왕은 모든 미혼 여성의 신랑 후보
    조선의 국왕이 점지된 짝을 찾는 방식은 권위적이다. 그는 초월적인 존재로서 특수한 방식의 정혼을 요구했다. 가가호호 미혼 양반 규수들의 신상에 정통한 중매쟁이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 광고를 내 후보 신청을 받는 공개 구혼이었다. 왕실에서는 국왕의 배필이 될 만한 규수를 구한다는 사실을 공론을 통해 조정에 널리 알렸다. 국왕이 모든 미혼 여성의 신랑감 후보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도발에는 국왕이 가장 인기 있고 매력 있는 남성임을 자타가 인정해주리라는 생래의 욕구가 은연중 도사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_ 2장 국왕이 전국에 공개 구혼하다

    ㆍ예비 신부는 어떤 대우를 받았나
    간택된 여성에 대한 예우는 초간택 직후부터 적용되었다. 처녀의 호위와 행색을 그 지위에 걸맞게 왕실과 정부에서 담당해왔던 터라, 비씨는 신변 보호는 물론 왕비에 준하는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전의 준비를 기했다. 생활용품에서부터 탈것, 복색, 궁녀의 시중, 관원과 군사들의 호위 및 별궁의 파수, 평상의 보고 체계, 신임 관료의 숙배, 별궁 출입 인원과 물품의 검사 등 모든 예우와 보안이 철저했다. 또 묘선된 날을 기점으로 공상 물종과 의전衣纏 등을 시행했다. _ 3장 별궁생활과 육례 준비

    ㆍ예비 신부를 보호하라
    비씨의 별궁생활은 바깥출입을 전혀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금궁禁宮이었다. 별궁 내외의 환경은 비씨를 위협하는 어떠한 여건도 허락하지 않았다. 무단출입이 불가능한 위수처衛戍處였던 별궁은 파수꾼들의 검문검색이 철저하여 출입패를 소지한 자에 한해 출입을 허용했다. 친인척이라 해도 예외를 두지 않아, 비씨는 그들을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별궁과 신부의 본가 주변에도 특별 조치가 취해졌는데, 여염집에 상중이거나 질병을 앓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내쫓았다. _ 3장 별궁생활과 육례 준비

    ㆍ왕실과 가까운 곳으로 신부 본가 ‘강제이사’
    도감의 업무 중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신부의 본가를 별궁에서 가까운 곳에 마련하는 일이었다. 별궁과의 거리에 관계없이 실제 본가는 육례를 거행하는 데 많은 불편이 뒤따랐으므로 한성부에 명하여 사가私家를 임대해 신부의 본가로 삼도록 했다. 인조 16년 장렬왕후(인천 부사 조창원趙昌遠의 딸) 가례 때에는 별궁인 봉림대군의 집 남쪽 담장 밖인 고판서 박정현朴鼎賢의 집으로 정했다. 그리고 인현왕후 가례 때에는 그전에 쓰였던 전현감 박세웅의 집이나 유학 박세만의 집이 행례하기에 좁고 불편하다고 하여 어의동 홍중보洪重普 정승댁으로 정했다. _ 3장 별궁생활과 육례 준비

    ㆍ‘왕의 결혼식’에 국가 예산은 얼마나 들었을까?
    『국혼정례』의 편찬은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절약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가례도감과 내수사에서 사용하는 국왕의 국혼 예산은 각각 2억2000만 원과 4억5000만 원이었다. 이 두 기관에서만 자그마치 6억8000여 만 원을 국혼 예산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호조에서 양 기관에 보낸 예산을 쌀 1800석으로 어림잡았을 때, 1년 예산의 약 2퍼센트에 해당된다. 호조의 1년 운용 예산은 영조 22년(1746)에 9만 석이라 한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_ 4장 납채에서 고기까지

    ㆍ창졸간에 ‘하급 관리’에서 ‘영감’이 된 기러기 배달자
    기러기를 궁궐에서 비씨 집으로 들고 가는 역할은 충찬위가 담당했다. 충찬위는 아들을 많이 낳고 풍채가 좋으며 복이 있는 사람으로 선발했다. 명복을 담은 함을 지고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숙명공주 길례 때 차출된 두 명은 서울 남부와 서부에 사는 이들로서, 각각 5남1녀와 3남1녀를 두었다. 화순옹주 때에는 아들 여섯을 낳은 80세의 김시감과 아들 넷을 낳은 63세의 정효달이 선발되었다. 창졸간에 영감이 된 충찬위는 당상관의 풍모를 갖추도록 겉치레를 했다. 장인에게 기러기를 드리는 신랑이 임금이므로 그 기러기를 들고 가는 사람은 그 위신에 맞는 고위직이어야 했다. 그리하여 생안충찬위는 흑단령을 입고 가슴에는 당상관의 흉배를 달아 국왕 사신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했다. _ 4장 납채에서 고기까지

    ㆍ국왕은 동등한 지위의 여성과 혼인해야
    요즈음의 결혼식은 옛날로 치면 동뢰연同牢宴이다. 동뢰연을 행하려면 신부를 초청해야 하는데, 그 전에 행해야 할 일로 일찍이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하나는 최고 통치권자인 국왕의 혼인 상대가 되려면 당사자인 여성은 어떠한 지위여야 하는가의 문제다. 다른 하나는 국왕이 친영해야 하느냐의 여부였다. 전자는 『예기』 「혼의」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임금이 지존으로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종묘를 섬기고 후세를 잇는 것에서는 부부가 일체이니, 임금이 대적할 만한 사람으로 신부를 그와 동등한 지위로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_ 5장 왕비 책봉은 혼례의 한 절차인가

    ㆍ왜 왕의 결혼식엔 음악과 춤이 없었을까
    이 동뢰연에는 축하 세리머니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길례인 제사에도 음악과 춤이 있는데 혼례에 음악과 춤이 없다니 왠지 낯선 느낌이다. 육례의 행사장에는 헌가軒架와 고취가 진설되기는 했지만 음악을 연주하진 않았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에는 대소의 거둥에 악부樂部를 폐지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 해서 인조 때에는 아예 이를 진설하지 말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인현왕후 가례 때에 와서 오례의대로 진이부작陳而不作, 곧 악기들을 진설해놓되 연주하지 말도록 했다. 대례를 중시하여 그 일을 엄숙히 하고자 음악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_ 6장 존비가 같아져서 친해지다

    ㆍ첫날밤에 ‘한 이불’은 현실적으로 무리
    악차로 들어간 국왕은 그 자리에서 바로 왕비와 첫날밤을 보냈을까? 오전 중이나 이른 오후에 동뢰연을 행했으니, 소위 첫날밤을 보내기에는 무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남녀의 성性을 금기시하다시피 한 유교 문화에서 존엄한 국왕의 성을 위한 준비와 절차는 차마 언급할 수조차 없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_ 6장 존비가 같아져서 친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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