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노컷뉴스 자료사진)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국가안보가 아닌 정권안보를 위해 사실상 조직 전체가 총동원되는 총력체제를 유지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검찰 수사에 따라서는 MB시절의 추가 적폐 행위는 물론 박근혜 정부 당시의 일탈행위도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이명박 정부 두번째 국정원장인 원세훈 전 원장은 잦은 조직개편과 원칙없는 인사를 하면서 내부직원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이 높았지만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조직 생리상 밖으로 표출되지 못했다. 당시 조직체계는 국정원장과 1차장(해외+북한 담당), 2차장(국내 담당), 3차장(과학.산업기술+대북심리전 담당), 1급이지만 정무직인 기조실장이 수뇌부를 이루는 구조다.
국정원개혁발전위원회가 국정원 내부에 설치된 적폐 T/F로부터 보고받아 발표한 자료를 보면 기조실장과 2차장, 3차장 산하 조직이 국가안보라는 사활적 국익이 아닌 이명박 정권의 안보에 동원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차장은 해외.대북 담당이어서 제외되는 모양새다.
◇ 약방의 감초 3차장 산하 심리전단(국)… 안걸치는 곳 없이 국민상대 심리전국정원 개혁위는 지금까지 이른바 '박원순 서울시장 관련 문건과 MB정부 시기의 문화.연예계 정부 비판세력 퇴출 건', '공영방송 장악 문건', '정치인.교수 등 MB정부 비판세력 제압 활동' 등에 대한 조사, 열람 결과를 발표했다.
이 세 자료에서 도드라지는 활동을 보이는 곳은 3차장 산하의 심리전단(국)이다. 심리전단은 '박 시장 제압 문건'과 '문화.연예계 블랙리스트 퇴출 문건'에 나온 내용을 온.오프라인 상에서 실행에 옮기는 등 대북심리전이 아닌 대국민심리전을 벌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심리전단은 정치인과 교수 등 MB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에 대한 심리전도 전개했는데 이명박 정부 시절 야댱 주요 인사였던 박지원 의원, 송영길 인천시장과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은 물론 안상수.홍준표 한나라당 대표, 김만복 전 국정원장,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등이 망라돼 있다.
◇ 2차장 산하 국익전략실(7국)…국내정보 수집해 정권안보 문서 생산 심리전단이 여론조작의 첨병역할을 했다면 이를 기획한 쪽은 2차장 산하의 국익전략실이다. 국익전략실은 국내정보 수집 부서(8국)가 건넨 정보를 분석해 보고서를 만드는 곳이다. 전국에 그물망처럼 뻗쳐 있는 정보수집관들이 보내오는 정보를 분석해 국가안보가 아닌 정권안보를 위한 보고서를 만든 것이다.
박원순 제압문건이나, 문화.연예계 블랙리스트 제압 문건 등이 국익전략실에서 생산됐고 이 문건 생산에 깊숙히 관련된 인사가 박근혜 정부에서도 승승장구했던 추명호 전 8국장이다.
추 국장은 이후 박근혜정부 인수위를 거쳐 청와대에서도 근무했지만 박 시장 제압 문건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국정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내 1급으로 승진, 7국장과 함께 또다른 요직으로 통하는 8국장에 임명돼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직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국익전략실에서 생산된 또 다른 문건은 이른바 '공영방송 장악 문건'이다. 국정원 개혁위는 지난달 18일 보도자료를 통해 국정원이 당시 공영방송 경영개입 정황이 담긴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 'KBS 조직개편 이후 인적쇄신 추진방안' 등 2건의 문건을 적성해 청와대 등에 보고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개혁위는 당시 발표에서 이 문건의 작성 주체를 밝히지 않았지만 CBS노컷뉴스 취재 결과 2차장 산하 국익전략실로 확인됐다.
KBS 문건의 경우 사실상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기자,PD들의 살생부라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이념적인 문제가 퇴출의 주된 원인이었으나 사찰을 통한 민감한 내용의 정보가 보고되기도 했다.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 문건에는 세부 추진 방안으로 간부진 인적쇄신 필요성을 담고 있는데 지방사, 자회사, 사장단 및 국장급, 부장급 간부에 대한 실질적인 살생부였다. 실제로 "지방사.자회사 사장단 일괄사표 제출"이라는 대목은 현실화 돼서 7명이 살생부 명단에 올랐는데 6명이 곧바로 교체 됐다.
◇ 예산.조직 등 담당하는 기조실장은 '좌파연예인 대응' 팀장으로
방송인 김미화와 황석영 작가가 9월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KT광화문 빌딩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에서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 블랙리스트 관련 조사 신청서를 제출하기 전 악수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원세훈 전 원장 취임 5개월 뒤에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문화.연예계에 대응하기 위해서 '좌파연예인 대응 T/F가 만들어졌는데 2차장이나 3차장 산하가 아닌 기조실장 직속으로 꾸려진 게 이채롭다.
이 전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라인으로 분류되던 김주성 전 실장을 팀장으로 하는 T/F는 방송인 김미화씨 등 정부 비판 연예인의 특정 프로그램 배제.퇴출, 이들이 소속된 기획사에 대한 세무조사 등을 추진했다.
기획과 부서별 조정, 예산 등을 담당하는 기조실장이 팀장을 맡은 만큼 그 영향력은 2차장 산하 문화.연예분야 및 방송담당 수집관 (I.O) 등에도 미쳤다. 이들 수집관들은 원 전 원장에게 '문화.연예계 좌파 실태 및 순화 방안'을 보고하고, 청와대 민정수석(실) 요청으로 '좌파 성향 연예인들의 활동 실태 및 고려사항' 문건을 만들었다.
또 'MBC 특정 문화.연예게 출연인물 퇴출 유도' 문건을 만들어 청와대에 보고하는 등 방송.문화.연예계에서 MB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퇴출하려는 청와대와 원세훈 전 원장의 손발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 범죄 조직도 그리면 국정원 조직도 될 판 … "국정원 완전히 엉망돼"국정원 적폐특위는 개혁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문건 작성 및 실행에 관여한 원세훈 전 원장, 김주성 전 기조실장 등을 수사의뢰했다. 검찰은 민병주 전 심리전단(국)장을 구속하고 2차장 산하 국익전략실장을 지냈던 신 모 국장을 소환하는 등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범죄 조직도를 그리면 맨 위에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자리잡고 그 밑에 2,3차장 산하와 기조실장 산하 관련 부서와 해당 직원들이 위치하게 돼 결과적으로 국정원 배치표와 비슷하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은 10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MB 시절 국정원의 일련의 행위들을 국기문란으로 규정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을 촉구했다. 국정원 불법.탈법 행위의 최고 정점 또는 배후가 이 전 대통령임을 전제한 것이다.
국정원 개혁위의 한 관계자는 "김대중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국정원을 많이 정상화시켜 놓았지만 성공하지 못해 이명박 정부 들어서 특히 원세훈 전 원장 시절에 옛날보다 더 국정원을 국내정치 쪽으로 돌려놨다"며 "국정원이 정부기관이 아니다. 저질스런 일들을 너무 많이 벌려 놔서 완전히 국정원이 엉망이 됐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 정도가 방해한 것 같다"고 덧붙여 적폐T/F의 조사나 검찰 수사에 따라서는 음지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적폐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터져 나올 수 있음을 시사했다.
더불어민주당 적폐청산특위 위원장인 박범계 의원도 기자들과 만나 "이명박 정부의 여론 조작은 국정원의 머리와 손발을 총체적으로 동원한 그런 시스템이 아니었나 하는 잠재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 MB정부 원세훈때만 그랬을까? …적폐T/F 조사대상 상당수는 박근혜 정권때의 일
그러나 국정원의 적폐행위가 이명박 정부에서만 일어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던 MB 정권에서 국익전략실 소속으로 박원순 제압문건 등을 생산하는 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추 모 국장은 인수위 - 청와대 - 국정원 8국장 등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는데 우병우 전 민정수석에게 직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어 새로운 뇌관이 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남재준 전 원장도 반공제일주의에 입각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해 국정원장의 직무 범위를 넘어선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국정원 적폐 T/F가 조사 대상으로 선정한 15개 사건 가운데 ▲국정원 간부의 청와대 비선보고 사건 ▲채동욱 전 검찰총장 개인정보 유출 사건 ▲화교 간첩수사 증거조작 사건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작성 관여 사건 등 상당수가 박근혜 정부에서 국정원이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는 사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