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자료사진)
이명박 정부 시절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수사 진행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받고, 형사처벌 수위까지 정해 지침을 하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정원이 사실상 검찰 수사를 주무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지휘한 것이다.
23일 국정원 개혁위원회에 따르면 국정원 내부 전산자료를 분석한 결과 2009년 4월17일자로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수사 진행 관련 문건이 상부에 보고된 것으로 CBS노컷뉴스 취재 결과 드러났다. 국정원 문건에는 당시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던 '명품 시계' 등 민감한 수사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개혁위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노 전 대통령의 검찰수사 진행 상황이 담긴 문건이 2009년 4월17일자로 작성돼 원세훈 국정원장 등 상부에 보고됐다"며 "문건에는 P사의 명품시계 종류까지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검찰 수사상황이 국정원에 상세히 보고됐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검찰 수사 상황을 보고받은 당일, 원세훈 전 원장은 모닝브리핑 회의에서 "동정여론이 유발되지 않도록 온·오프라인에 노 전 대통령의 이중적 행태 및 성역 없는 수사의 당위성을 부각시키겠다"는 계획을 함께 보고받았다. 이때부터 국정원의 '노무현 망신주기'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사흘 뒤인 2009년 4월20일 원 전 원장은 "검찰측에 법과 원칙에 따른 성역 없는 수사를 지속 독려하는 한편, 언론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이중적 행태를 지속 부각, 동정여론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는 내용을 다시 승인했다.
원 전 원장은 검찰 수뇌부를 대신해 사법처리의 수위까지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자 원 전 원장은 모닝브리핑 등 부서장 회의에서 국정부담을 이유로 '불구속 수사' 의견을 수시 표출했다고 한다.
원 전 원장의 뜻을 검찰에 전하기 위해 측근이었던 국정원 모 간부는 4월21일 이인규 당시 대검찰청 중수부장을 만나 직접 '불구속 수사' 의견을 전달하기에 이른다.
해당 국정원 간부는 이 전 부장을 따로 만난 자리에서 "고가시계 수수건 등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므로 언론에 흘려서 적당히 망신 주는 선에서 활용하시고, 수사는 불구속으로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라고 세세한 지침을 전달했다.
원칙적으로 수사 기밀을 유지해야하는 사안에 대해 시시콜콜하리만큼 미리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신병 처리부터 언론 플레이 수위까지 현직 검찰총장도 하기 힘든 역할을 국정원이 한 것이다.
(사진=노컷뉴스 자료사진)
국정원 간부가 이 전 원장을 만난 다음날인 4월22일 KBS에서 '명품 시계 수수' 관련 첫 보도가 나오면서 피의사실 공표가 본격화됐고, 노무현 망신주기 일환의 언론사 보도경쟁이 불붙었다.
그리고 5월13일 SBS에서는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명품시계 두 점을 논두렁에 버렸다"는 일명 '논두렁 시계' 관련 내용이 보도됐다.
노 전 대통령은 매일같이 출처를 확인하기 어려운 '사정당국'발로 쏟아지는 망신주기식 보도에 심한 압박감을 느꼈고, 결국 논두렁 보도가 있은지 딱 열흘만에 서거했다.
한편, 이번 국정원 조사에는 "논두렁에 버렸다"는 내용을 누가 언론에 흘렸는지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국정원 내부 자료에 '논두렁'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문건은 발견되지 않았고, 이를 보도한 SBS 기자는 "검찰에서 들었다"고 진술해 검찰에서 흘렸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노무현 망신주기'라는 국정원 지침에 결과적으로 충실히 따랐던 이인규 전 부장은 논두렁 보도와 관련해 "지금 밝히면 다칠 사람들이 많다"며 구체적인 진술을 거부했다.
이처럼 국정원과 검찰, 언론의 검은 커넥션의 민낯이 드러나자 정치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검찰 출신으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국정원 간부가 대검 중수부장을 만나서 특정사건에 대한 불구속 수사 및 피의사실 유출을 사실상 지시한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면서 "지시를 받은 중수부장이 당시 검찰총장에게 보고했는지, 청와대의 개입은 없었는지 철저히 조사해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촉구했다.